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1950년 7월 6일, 괴산군, 청원군의 각 마을 국민보도연맹원(이하 보련)들이 소집되어 군용트럭에 실려 와 증평의 양조장 창고와 농협창고에 아무런 법적절차도 없이 예비검속되었다. 정부에서 만든 단체에 가입한 터에 경찰서장의 강연이 있다하니 바쁜 일손을 접고 소집에 응했던 것이다. 처형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몸을 피했던 사람도 스스로 돌아와 몸이 묶였다.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출타중인 형 대신 동생이 검속되었다가 다시 교체되는 사례도 있었다. 용변을 보라며 도망칠 기회를 주었으나 다시 검속 대열로 돌아오는 이도 있었는데 이는 도망친 자신 때문에 가족이 희생될 것이라는 공포감이 스스로 발을 옭아맸을 것이다.

1951년 7월 9일 오후 1시 죽음의 공포에 억눌렸던 날들이 지나고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기관단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괴산ㆍ청주경찰서 경찰과 헌병대, CIC대원 40여 명은 예방학살의 준비를 끝내고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골짜기에 대기 중이었다. 처형장소를 골짜기로 택한 것은 시체를 밀어 넣기 수월한 까닭이었다. 자신의 친구나 그의 형과 동생 혹은 먼 혈육이 검속 대상에 들어 있는 것을 아는 이 사살대원들도 왜 안타까운 마음이 없었으랴. 그러나 인륜의 도리가 멸살된 전시체제의 명령수행 중이니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형 대상은 괴산 불정면 지장리 새곡마을, 괴산 사리면 사담리, 송오리, 방축골, 수성리, 불당골, 하도리, 진암리 진지바위, 산정리 산정말, 중리 중말, 청원 북이면 신기리 일대에서 소집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괴산군의 소수면과 청안면, 청원군의 북일면 보련원들은 이 참사의 대열에서 빠져있었다. 당시 소수면와 청안면의 경우 지서 주임의 결단으로 보련원을 풀어주어 살상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지시주임이 처벌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북일면에서는 청년단장으로 활동하던 유흥렬 씨가 소방서에 감금되어 있는 보련원 40명 (9명은 이미 처형)을 지서 주임과 협상하여 풀어주게 된다.

보련원을 마치 가축처럼 실은 트럭이 연이어 도착하였다. 미혼이거나 어린 자녀를 둔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의 슬픈 영혼을 씻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7월의 장대비가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그들은 포승줄이 아닌 새끼줄로 양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1시 경에 시작된 학살은 오후 5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어느 조는 열 명이 줄로 세워지고 어느 조는 스무 명이 줄로 세워졌다.

현장 목격자인 희생자 유족 정종수씨는“앞에 있는 사람을 쏴서 자빠지면 그 사람 시체를 구렁챙이에 넣고 자기가 또 그 위치에…”라고 증언하고 있다. 죽은 자를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당시 의용소방대원이었던 윤기병씨는 농사군 형색을 한 사람들을 개잡듯 죽였는데, 월북작가 홍명희의 계모인 조씨(당시 74세)가 흰 한복차림으로 현장에서 외따로 처형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인솔장교가 780명이 죽었다고 보고하는 걸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밖에 괴산읍 남산, 감물면 백양리 공동묘지, 청안면 솔티재 등에서 보련원들이 희생되어 괴산 지역의 당시 희생자는 1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진행된 살상은 그 뒤가 더욱 참혹하였다. 흙으로 제대로 묻히지도 않고 거의 골짜기에 방치된 시신은 산 짐승에게 훼손되면서 부패하고 있었다. 총상으로 사망할 경우 더 쉽게 부패된다고 한다. 유족들은 옷차림으로 겨우 시신을 확인하였다. 뒤늦은 유족은 확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미확인된 유골이 200여구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슬프다, 전쟁의 역사는. 이 영혼들을 위해 옥녀봉에 무명의 비문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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