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정(청주시 청원구 환경위생과)

신원정 <청주시 청원구 환경위생과>

오래된 책장을 정리하다가 낡은 천주머니 속에서 윷을 발견했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윷을 버릴까 고민하다가 일단 가족들을 거실로 모았다. 하트, 별 모양이 요란한 담요 하나를 펼쳐놓고 각자 윷말을 하나씩 준비했다. 지우개, 100원짜리 동전, 볼펜 뚜껑, 강아지 사료가 윷판에 옹기종기 모였다.

설도 정월대보름도 지났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갑작스럽게 윷놀이를 시작했다.

“앞으로 몇 칸 가야 되지?”

“이쪽으로 가도 되나?”

기억도 가물가물한 규칙을 찾느라 인터넷을 보다가 윷놀이의 기원, 유래 등을 같이 읽어보게 됐다. 아이들이 즐기는 단순한 놀이라고 생각했는데, 윷에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윷판은 농토를 상징하고, 윷을 던져 움직이는 윷말이 계절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풍년이 온다고 믿었다.

또한 이러한 집단놀이는 마을 사람들이 참여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공동체의식을 통합했다고 한다. 과연 선조들의 지혜란. 온 가족이 모여서 이렇게 공동체(?)가 된 게 얼마 만인지.

저녁에 4명의 가족이 모두 모여 있어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날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나운서가 말하는 뉴스 소리와 ‘뿅뿅’ 게임 소리만 들리던 거실에 오랜만에 슬픈 비명소리와 기쁨의 만세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던져진 윷의 모양을 따라 이름 붙여진 도‧개‧걸‧윷‧모 역시 농사와 관련돼 있다. 각각 돼지, 개, 양, 소, 말의 크기와 걸음걸이를 상징한다.

한 개가 젖혀진 도는 한 밭을 갈고, 두 개가 젖혀진 개는 두 밭을 갈고, 네 개가 모두 젖혀지거나 엎어진 윷과 모가 나오면 무려 한 번을 더 던질 수 있다.

사실 규칙상으로 보면 윷과 모(소와 말)가 나와 많이 나아가야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막상 놀이를 진행하다 보면, 도가 나왔다고 아쉬운 것도 아니고 모가 나왔다고 1등도 아니었다.

윷말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승자는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윷말이 꼭 앞으로 가야지만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운 좋게 나온 뒷도 하나가 승패를 가르는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다.

한 시간 넘게 엎치락뒤치락하며 이어진 우리 가족의 윷놀이는, 내가 던진 윷이 우연히 뒷도가 나오면서 끝이 났다.

출발 지점 바로 앞에서 두 알을 업고 있던 강아지 사료가 뒷도로 한 칸을 뒤로 가면서 마지막 지점에 들어왔고, 사료 네 알이 모두 동났다.

1등으로 달리던 볼펜 뚜껑과 뒤를 바짝 뒤쫓던 지우개는 이럴 수가! 망연자실했다. 윷놀이 우승으로 가족들에게 2018년 최고의 농부상(?)을 받았다.

2018년 나의 윷판에도 윷말들이 부지런히 달리고 있다.

도가 나올 때도 있고 모가 나올 때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윷말에 괘념치 않고 나의 밭을 열심히 갈다 보면 언젠가 웃을 날이 있지 않을까. 올해 나의 윷판에 풍년이 가득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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