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민(한국건강관리협회 충북·세종지부 내과전문의)
이현민(한국건강관리협회 충북·세종지부 내과전문의)

 

(동양일보)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이자 마지막 황태자인 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였다.

혈우병은 피가 날 때 지혈 작용을 하는 12개의 주요 혈액응고인자 중 하나가 부족해서 생기는 질환이다. 따라서 혈우병 환자들은 작은 상처에도 피가 쉽게 나고 잘 멈추지 않게 된다. 유전성 혈우병의 경우 혈액응고인자를 생성하는 유전자에 변이가 발생하여 혈액응고인자가 만들어지지 않아 발생한다.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낫게 하기 위해 황제 부부, 특히 황후인 알렉산드라는 떠돌이 승려 그레고리 라스푸틴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황제 부부의 총애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은 전횡을 일삼게 되고,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무너지게 된다.

왜 1남 4녀의 자식들 중 아들인 알렉세이 혼자만 혈우병 환자였을까? 혈우병은 성염색체 중 X 염색체를 통해 열성 유전이 되는 질환으로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황후가 보인자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염색체는 44개의 상염색체와 2개의 성염색체로 구성이 되는데 성염색체는 성별을 결정한다. 남자는 XY, 여자는 XX 형태인데 아들의 경우 X 염색체는 어머니로부터 Y 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게 된다. 딸은 각각의 X 염색체를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하나씩 물려받는 것이다. 열성 유전은 특정 유전자 변이가 한 쌍의 염색체에 모두 발생했을 때 질병이 발현하는 유전 형태를 가리킨다.

어머니가 보인자라면 아들에게 질병이 유전될 확률이 50%, 정상일 확률이 50%가 된다. 딸의 경우는 아버지는 정상이라는 가정 하에 보인자가 될 확률이 50%, 정상일 확률이 50%가 되는 것이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딸이자 알렉세이 황태자의 누나들인 네 공주들은 정상이거나 보인자였기 때문에 무증상이었고, 절반의 확률로 아들인 알렉세이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난 것이다.

사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부모로부터 유전이 아닌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 혈우병 보인자였다. 부군인 알버트 공과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두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여러 왕가들과 사돈을 맺게 되고, 이로 인해 유럽 왕족들에게 혈우병 환자가 여럿 발생하게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알렉세이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가 아니었다면, 혹은 20세기 초에 혈우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러시아 역사, 그리고 세계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근에는 완치를 위해 유전자 치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아직은 실제 치료에 이용하는 것은 요원한 것이 사실이지만, 언젠가 혈우병을 완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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