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보은 오부자대추농원)

 

김태형(보은 오부자대추농원)
김태형(보은 오부자대추농원)

 4.19학생혁명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와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타도한 학생민주혁명이다.

나는 58년 전의 그 학생혁명의 3대 발원지에 청주가 당당하게 들어있어야 마땅한 사실을 주장하며 살아 왔다.

1960년 3월 7일 부통령 장면박사 지원 유세차 박순천여사가 청주를 방문해 선거유세를 했다. 그는 자유당의 독재정권과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연설을 했다. 그 열띤 유세를 듣고 당시 고교생이던 청년들이 불의에 대한 분노와 불타는 정의감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1960년 3.15부정선거가 이루어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선거후부터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와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과 울분이 공론화 됐다.

나는(당시 나의 이름은 김연웅이었다.) 권력자들의 이 같은 잘못된 실정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라며 학우들에게 흥분하며 이야기 했더니 선뜻 나와 뜻을 함께 하겠다고 나서 주었다. 내 뜻에 기꺼이 따라 준 그들은 바로 청주공고 2학년 김연웅, 김영한, 강건원, 박노경, 오종석, 이현찬, 김정호, 이영일, 곽한소, 이해우, 오병화, 노창은, 김연옥 1학년 김용길, 김지학, 김택현 등 20여 명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4월 3일, 상당구 수동 213번지 나의 자취방에 모여 우리의 뜻을 끝까지 함께하기로 굳게 맹세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토론을 했다. 우선 각 학교 선배와 동기생들을 찾아다니며 우리의 뜻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당에서 3.15부정선거를 무효화해야 된다는 소송을 했으니 그 결과가 나온 후에 보자며 한 발짝 물러나는 자세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상관치 않고 서로서로 격려하며 우리들만이라도 정의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기로 결의를 다졌다.

4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조를 짜서 그에 필요한 것을 준비해 활동에 나섰다. 우리들은 밤을 새워가며 전단지를 만들어 재학생들과 각 학교 간부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 주고 우리의 계획을 이해시켰다.

글씨를 잘 쓰고 그림솜씨가 뛰어난 김용길과 김지학, 김택현은 4.13 의거를 알리는 대자보를 만들어 교내 곳곳에 붙이기로 했다.

그리해 1960년 4월 13일, 드디어 우리 청주공고 2학년을 비롯해 재학생 약 200~300여 명이 청주역 광장에 집결해 ‘부정선거 무효’와 ‘부패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4월 13일 충북학생의거는 청주공고 2학년생들이 주동이 되어 시작함으로써 청주시내에 확산된 출발점이자 도화선이 됐다.

시위에 앞장선 나와 뜻을 함께한 20여 명은 막강한 권력에 겁 없이 저항한 용기 충천한 혈기로 거리에 뛰쳐나가 우리의 주장을 마음껏 외쳤다.

지금도 우리가 잊지 못하는 일 중의 하나가 우리들의 정의에 불타는 행동을 진정으로 지원해 주신 분들이 계셨다는 사실이다. 오직 정의감으로 교문을 박차고 거리에 뛰쳐나간 제자들을 사랑으로 격려해 주고 보듬어 주신 윤봉수 교장선생님을 비롯해 송인기 선생님, 김현태 선생님, 최종대 선생님들이 바로 그분들이시다. 그분들께는 4.19만 앞두면 언제나 고마운 마음으로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4월 16일에도 청주공고 운동장에서 입영자들이 집결한다기에 그들이 동조 해 줄 것을 믿고 시위를 시작했다. 2학년을 선두로 해 1학년과 함께 약 500여명이 함께 청주역전을 지나 북문로로 달려갔다. 그때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해산됐고 시위 과정에서 약 30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됐으나 2시간여 만에 훈방 조치됐다. (1960년 4월 17일자 한국일보 보도)

4월 17일 일요일 정오엔 청주중앙공원에서 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하기로 했다. 이날은 청주 장날이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우리를 도와 시위를 할 것으로 믿고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누군가의 밀고로 경찰기마대의 강력한 사전 저지로 말미암아 시위는 무산되고 말았다.

4월 18일은 청주공고 전교생을 비롯해 각 학교 학생들이 청주상고 운동장에 모였다. 청주공고 3학년 최무웅, 오성섭 등의 협조로 청주공고생들과 청주상고생 등 2,000여 명이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며 노도와 같이 도청 및 경찰서 방향으로 향했다. 시위대들은 북문로 철길 후미길(지금의 동신약국자리)에서 기마경찰과 투석전을 하던 중 다수의 학생들이 연행됐다. 이들은 문학봉 경찰국장님의 훈계를 듣고 그날 밤에 석방됐다. 학생들에 대한 사회적 애정과 당시 정권에 대한 불만의 공감대가 이뤄지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결과였으리라.

6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그날의 일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서울 수유리 국립4.19 민주묘지 내 ‘4.19혁명 기념관에 있는 충청편을 보면 잘못 기록된 것들이 그대로 있다. 몇 가지를 지적한다면

(1) 4월17일 청주고교생과 청주상고생이 시위 중 경찰과 유혈충돌로 기록되어있으나 청주에서는 시위가 없었다.

(2) 4월18일자 청주고교생과 청주상고생이 앞장서서 시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청주공고생들이 주도해 청주상고생 등 2000여 명이 시위했다.

(3) 영상자료에 의하면 4월 19일에 청주공고 학생 500여명이 데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4월 19일에는 청주농고생과 청주대 학생들이 시위했다’고 해야 한다.

(4) 청주공고생들이 4월 13일부터 4월 16일, 4월 18일, 4월 19일까지 4회에 걸쳐 3.15부정선거 무효화를 위해 시위계획을 세우고 각 학교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에 가담할 것을 설득하고 앞장서서 시위했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청주시는 마산, 부산에 이어 4.19학생혁명의 3대 발원지여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4.19 학생혁명사의 올바른 기록을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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