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처럼 아찔한 도시, 시에고 데 아빌라에서 만난 여류시인. 헌책 파는 가게 판자 틈새로 스며든 햇살이 백발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시골 맛 쏠쏠한 중부지방, 이름값 할 것 같은 시에고 데 아빌라(CIEGO DE AVILA)에 발 들인다. 터미널에서 물으니 걸어서 둘러봐도 다리 아프진 않을 거라 일러준다. 얘길 듣자마자 눈앞 택시나 마차가 연극 소품처럼 보인다. 어떤 게 아찔하도록 해 줄까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시가지를 더듬지만 이십 분 만에 철길이 가로막는다. 말끔하게 정돈된 골목에선 아찔함을 찾기 힘들 것 같아 철길 따라 두 블록 벗어나 본다. 좁은 도로를 건너자마자 말끔하던 길이 울퉁불퉁하게 바뀌면서 샌들이 턱턱 걸린다. 바닥에 시선을 둔 채 곧게 난 도로 따라 터덜거리며 걷는 동안 부엔디아, 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설마, 하며 고갤 들어봤더니 지나치는 사람들이 인사 건네는 소리다. 뒤늦게 손을 들어 보이며 올라, 라고 화답하는 얼굴에서 열꽃이 핀다. 그럴 때 얼굴 식혀주는 건 갓 칠한 듯 보이는 건물의 푸른색, 아치형 대문 위 혁명 구호는 아찔함을 맛보기로 드러낸다.

코발트색 건물 지나치기 바쁘게 콘크리트 벽체에 매달린 낡은 나무 대문이 발목을 턱 잡는다. 유채색과 무채색, 명암마저 분간되지 않아 켜 이룬 적막 한 무더기가 먼지에 섞여 날아든다. 암순응 거치는 듯 눈 찡그려 안을 들여다본다. 철근 이어 만든 책꽂이에 낡은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고, 소품인 듯 기댄 여자가 망막에 잡힌다. 백발에 담겼을 낡은 지식과 적막 깨뜨리지 못한 혁명 구호도 묘한 대비를 이루며 어룽거린다.

머리 위, 아슬아슬 걸쳐둔 판자 틈으로 카리브 해 햇살이 스며들고, 흘러내린 커피 자국이 회칠한 벽을 따라 찰지게 매달렸다. 에스프레소 습기 말리려는 햇살 몸부림이 애틋해서 건물을 얼기설기 받치고 있는 거미줄 모양 전선마저 배배 꼬인 걸까. 길을 달리해서 스며든 한 줄기 빛이 여자 머리칼을 금발로 바꾸고, 짐작하기 힘든 거리 땜에 조심스레 여자에게 다가가서 표정을 살핀다. 입 꼬리 길게 찢으며 지그시 바라보는 걸로 보아 몇 천 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호기심보다 두려움의 무게가 커서 살짝 벌어졌던 입이 도로 닫힌다. 엉겁결에 짜깁기 한 문장은 책, 파는 거 맞느냐는 엉성한 의문문이다. 그런 질문 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이는 여자, 삶에 찌들어 보이긴 해도 눈빛은 그지없이 맑다. 꽂힌 책은 건성으로 훑고, 책꽂이 옆에 걸린 수채화 두 점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화폭 속 낡은 주택은 언제 그린 건지 알 수 없지만 말 탄 소녀는 그녀를 모델 삼은 게 맞을 것 같다. 가림막 삼고 있던 액자 두 개 너머로 여자의 지난 얘기가 흘러나온다.

결혼하지 않은 데다 얼마 전 양친까지 잃어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는 그녀. 정부에서 배급을 주긴 하지만 모자란 생필품 사기 위해 읽었던 책을 내다 파는 거란 말을 한숨에다 버무린다. 귀로 얘길 들으며 눈으로는 눈썹 그득 매달린 슬픔을 읽는다. 이야기 끝난 뒤 나도 모르게 여길 어떻게 오게 됐는지 술술 털어놓고, 그녀 또한 이름나진 않아도 시인이라고 밝힌다. 가림막이던 액자가 눈치를 챈 건지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둘은 상대방 눈동자 속 돌부처 찾아내는 일에 몰입한다. 혼자 한 평생을 산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래 전 약속을 잊지 않고 찾아와줬구나 하는 속내가 바삐 오간다. 잠깐 동안이지만 삶에 지친 표정 오롯이 읽기엔 모자라지 않다. 그녀 도와줄 일을 찾다가 카이로프락틱을 떠올리고, 마사헤 조금 배웠다 말한 뒤 자전거 안장 뜯어 만든 의자를 가리킨다. 의자에 천연스레 걸터앉는 그녀 뒤로 돌아가 두 손을 어깨에 내려놓는다. 엄지 살짝 갖다 댔을 뿐인데 몸을 비틀며 끙끙 앓는다. 몸이 내는 소리가 가야금 음폭보다 넓은 것만 봐도 남자 손닿은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손목 힘 빼고 주무른 어깨에서 막 끊어질 듯 팽팽해진 현 한 가닥이 만져진다. 엄청 아팠을 텐데 어떻게 견뎌냈을까 싶어 승모근에 이어 능형근과 극상근 부근 통증 유발점을 짚어 나간다. 뭉친 근육을 십분 쯤 주물렀더니 손목이며 손가락이 뻣뻣해진다. 동작을 멈추고 물러서서 주먹을 쥐락펴락하다가 어깨를 휘둘러 빼앗긴 기운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걸 본 여자가 일어서서 책꽂이 뒤편으로 돌아가 책 한 권을 꺼내온다. 그녀가 건넨 자작 시집은 진열해둔 책과 달리 표지가 말끔하다. 반환표(BOLETO DE RETORNO)라는 책 제목을 들여다 본 뒤 낱장을 펼친 순간 VISA USA라는 시가 시선을 빨아 당긴다. 내용이 예사롭지 않아 조심스레 묻는 순간 멈칫하던 그녀 눈망울이 다시 젖어든다.

시집으로 얼굴 가렸던 여자가 아찔한 얘길 들려준다. 결혼하기로 한 남자가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받아 나오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고. 그 땜에 40년 동안 결혼하지 않고 한 남자만 가슴에 품고 지냈구나 싶어 코끝이 찡해진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고 난 시인은 깜빡 했다는 듯 첫 장을 펼쳐 사인을 한다. 오래 전 추억 때문에 눈썹 끝에 맺힌 이슬방울이 햇살에 반짝이고,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아 그랬던지 글씨는 구불구불하다. 헌책방에 감도는 음울함을 지우려는 듯 여자 한 명이 들어서고, 커피 한 잔 하러 가자며 시인 손을 잡아끈다. 끌려가던 시인이 여자 눈치를 살펴가며 나더러 따라가지 않겠느냐 묻는다. 나는 식사 전이어서 커피 마실 생각이 없다고 겸연쩍은 듯 대답한다. 아차, 싶었던 나는 앞서가는 두 사람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뒤따른다.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돌아보던 시인 입 꼬리가 순식간에 찢어진다. 서서 마셔야 하는 좁다란 카페, 모카 포트에서 솟아오른 수증기가 유럽풍 그림 한 폭을 그려 나간다. 판자를 잘라 만든 메뉴판, 한 잔에 1페소라고 적힌 걸 보고 5페소를 시인에게 쥐어주며 손을 높이 들어 보인 뒤 다잡는 걸음이 휘청거린다. 발목 접질릴까봐 이름만으로도 아찔한 시에고 데 아빌라가 곧게 난 길로 나를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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