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수(월간 개벽신문 주간)
박길수(월간 개벽신문 주간)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1. 지금부터 약 100년 전,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긴 지 10여 년째 되던 1920년대 초반에, 소파 방정환(1899~1931) 등의 ‘청년’들이 ‘어린이운동’을 시작했다. 어린이운동의 의의는 그때까지 ‘어린놈’이던 아이들을 ‘어린이’로 호칭하는 데서 상징적이고 극적으로 드러난다. 즉 사랑받기는커녕 천대와 멸시 또는 화풀이의 대상이 되고,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 받지 못하던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고 나아가 ‘미래세대’로서 귀히 여기자는 운동인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 어른’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 ‘천민, 여성, 어린이’는 이중삼중의 구속(천대) 대상이었다. 1920년대에 어린이들과 여성들은 그 위에 다시 식민치하라는 삼중사중 구속 하에서 신음하였다. 그런데, 그때 어린이들이 특히 보호나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의 사회에서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통계를 인용할 수 있는 시점으로 비교를 해 보면, 1960년 우리나라 인구 100명 중 42명이 아동인구(14세 이하, 1000만/2500만)였고, 단 3명만이 노인인구(65세 이상, 72만/2500만)였다. 그러나 2017년에 아동인구(640만/4900만)는 100명 중 13명으로 격감(33%)하였고, 노인인구는 100명 중 14명(680만/4900만)으로 급증(475%)하였다. 2017년은 우리나라에서 사상 처음으로 노인인구가 아동인구보다 많아진 해였다.

1920년대에서 1960, 70년대까지는 어린이(아동)가 흔하디 흔하고, 그래서 천대받았다면, 오늘날은 노인이 넘쳐나고 그래서 천대받는(다고 생각하는) 시대로 전환되어 온 것이다. 오늘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일구어 온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에 값하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60대 이상의 노인세대와,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뭘 해도 먹고살 수 있는 성장 시대의 과실을 독식하면서, 우리 사회를 ‘헬조선’으로 만들어 온 것이 ‘기성세대’라고 말하는 2030세대 사이에 ‘낀’ 세대가 오늘의 4050세대이다.

부모를 부양하는 책임과 자식의 결혼까지의 책임을 동시에 져야 하는 마지막 세대. 그러면서 대체로 자신의 노후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한 세대. 그러나 2030세대가 볼 때 4050세대는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민주화운동을 경력으로 내세우면서도, 스스로 권위의 화신이 되어 그것을 누리면서 기득권 수호에 연연하는 기성세대일 뿐이다. 게다가 노인세대가 볼 때, 4050세대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철부지로서, 대한민국의 수호자이며 건설자인 자신들을 뒷방으로 밀어 넣어버린 부도덕하고 ‘빨갱이스러운’ 세대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은 ‘어린이운동’에 더하여 ‘늙은이운동’이 필요한 시대이며, 그 중요한 축을 담당할 사람들이 바로 4050세대이다. 그것이야말로, 4050세대의 노후준비운동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으로 ‘고령화사회’ 문제를 들여다보면 어떻게 될까?

2. 우리 사회에서 세대 간 갈등이 비등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현재 20세에서 80세까지의 한국인 속에는 각각 수백 년에 걸친 시대적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이른바 세대 차이는 30년, 10년 주기가 아니라 1년 미만 단위로까지 나타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압축 성장’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서구사회가 2~300년간에 걸쳐 경험해 온 사회변화를 4~50년 사이에 겪어내면서, 의식의 변화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여 머리(이성)와 가슴(감성) 곳곳에 적체되어 있으며, 그것이 일으키는 ‘마찰’이 실제 이상의 갈등으로 비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세대 간 갈등이다.

지난 100여 년간의 우리 역사에서 기성세대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3.1운동은 외세로부터의 독립운동이기도 하지만, 왕조를 극복하고 공화국(共和國)을 건설하는 운동이었다. 1920년대 ‘청년’들의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은 국권상실을 초래한 낡은(전통) 사상과 문화를 극복하고 서구의 신사조를 배우고 익히자는 운동이었다. 1960년대의 사회운동은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와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기득권 세력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운동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물론 치열한 ‘극복’의 정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3.1운동과 4.19혁명,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과 현재진행형인 촛불혁명까지 유구한 역사를 만들어 올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언제나 앞선 운동의 실패와 좌절, 특히 변절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다는 데서 문제가 생겨난다.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기성세대는 친일화되었으며, 4.19세대는 산업화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되고, 부마항쟁에서부터 6.10항쟁까지의 성과는 야권분열과 3당 합당으로 얼룩졌으며, 386세대 역시 기득권화해 간 세력으로 지탄받는 등등.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극복 대상으로서 점철되어 온 한국사’를 ‘계승과 발전 대상으로 재해석하고 재정립’하는 것이 긴요해 보인다. 현재의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 국군의 시발점을 ‘광복군’으로 삼고,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예우를 강화(=정상화)하며, 헌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그 전문에 우리 역사의 주요 고비들을 선순환적 매듭으로 명시하고자 하는 일 등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또 바로 그런 측면에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운전자론’이나 ‘주류교체론’은 단지 정치적인 함의만이 아니라 역사적이며 철학적인 함의를 갖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오늘날 ‘고령화 시대’의 징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가 ‘종교계’이다. 우선 고령화 시대와 ‘평행’하는 문제이기도 한 ‘어른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오늘의 종교계에는 예전에 비하여 존경할 만한 ‘어른’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문자 그대로 종교계의 고령화는 사회 어느 분야보다 두드러지며, 신도들의 평균연령이 높아지는 속도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 가파르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새롭게 종교인구로 유입되는 젊은이(어린이-학생-청년)들이 급감하는 데 따른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오늘의 종교는 더 이상 신세대에게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영향력 있는 통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 전반의 ‘탈종교화 현상’의 여파가 종교계 고령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종교 교리나 성직자의 설교는 시나브로 물질문명, 과학기술 중심의 현실사회 진행방향과의 괴리감이 커져 왔다. 청소년들의 롤모델은 존경할 만한 연륜 깊은 성직자, 교회오빠, 성당누나에서부터 아이돌이나 SNS스타로 옮겨 갔다. 그 밖에도 ‘유사종교’라고까지 할 수많은 신문물들이 젊은이들 종교 이탈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고령화 사회에서 ‘늙은이’들의 소외감을 증대시키는 요인 중 하나를 잘 설명해준다. 다시 말해 오늘날 삶의 지혜나 기술은 더 이상 전통적인 것 혹은 연륜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해마다, 달마다, 심지어 거의 매일 새로운 지식과 정보와 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그것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 쉽고 빨리 습득하게 마련이다. 예컨대 전통사회에서 늙은이나 어른들은 노을이 지는 모습이나 앞산 꼭대기에 구름이 걸린 모습만 보아도 내일의 날씨나 한 해의 풍흉을 말할 수 있는 예지력을 갖추고 있었고, 따라서 젊은이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스마트폰이 그 모든 것을 대행하며, 그 스마트폰은 젊은이일수록 능숙하게 다루고 이용하며, 그런 만큼 기성세대에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다. 그 결과 준비 없이 맞이한 은퇴 후의 시간에 늙은이들은 점점 고립감을 느끼고, 늘어난 수명만큼의 세월을 소외감 속에서 분노를 표출하거나 혹은 삭이며 살아가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렇다고 해서 늙은이가 잃어버린 행복과 자존감을 젊은이들은 누리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현대사회의 비극이다. 젊은이들은 그들대로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추고도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여 ‘결혼과 출산’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서마저 소외되거나 혹은 그것들을 자진반납한 채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나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새로운 문화는 ‘웃픈(웃기지만 슬프다)’ 대안(代案)일 뿐이다.

4. 1920년대의 어린이운동은 한편으로는 ‘청년운동’이었다. 어린이운동을 전개한 주역들이 청년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다른 한편으로 미래의 청년인 어린이들을 밝고 건강하며, 자존감 풍부한 사람으로 기르기 위한 청년 양성을 위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시대, 기성세대는 그 ‘청년’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예컨대, 청년운동이 양적 질적으로 폭발하는 기점이 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수장,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1861-1922)는 3.1운동 후에 서대문감옥 갇혀 있다가 천도교청년들이 ‘청년회’를 결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거 참 잘 되었네. 내가 이 일(독립운동)을 하는 까닭도 바로 그걸(청년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나섬)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현재의 청년들은 ‘미래의 청년인 어린이’를 위하여, ‘어른들’은 현재의 청년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일하던 시대이다.

이때 ‘청년’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담당자이며,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 향유하며 사회에 전파하는 책임을 지는 세대이다. 당시 청년(靑年)이라는 말 자체가 이제 막 생성되어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상(途上)의 존재였다. 그러면서 여성, 어린이,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 전체를 지도하는 지도자요, 선구자였다. 그 시대의 과제를 헤쳐 나가는 소임을 자처하는 이름이었고, 그러므로 암흑의 시대에 희망의 빛을 찾아 나아가는 개척자였다. 늘어난 수명을 고려할 때, 오늘날 4050세대는 100년 전 ‘청년’들의 사명을 그대로 짊어지고 있다. 오늘의 방정환이라면, 그는 어린이운동가이면서, 청년운동가이며 무엇보다도 ‘노인운동가’일 것이다. 그 모든 운동을 관통하는 중심 이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무엇으로 운동하며, 무엇을 위하여 운동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자존감(自尊感)이다.

1920년대의 소파가 천대받는 어린이들을 ‘식민지백성, 조센징’에다가 ‘어린놈’에서 ‘어린이’로 격상시킴으로써 ‘한울님’처럼 존중하자고 한 것도 결국은 자존감을 높임으로써 독립의 의지를 잃지 않게 하고, 굳건히 자주국의 주역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오늘 2030, 4050, 6070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돌아보면, 소외감(늙은이)과 박탈감(젊은이)과 책임감(4050)에 짓눌려 자존감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제의 ‘어린이운동은’ 오늘날 ‘늙은이운동’이면서 ‘젊은이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국가사회적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선진화’가 요구된다. ‘선진국으로의 진입’이라고 해도 좋다. 이때 선진화는 우리가 지난 100여 년의 역사에서 한 번도 온전히, 오롯이 성공해보지 못한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의 성과는 성과대로 계승하고, 한계는 한계대로 극복하면서 그 모두를 아울러, 오늘 우리 국가사회의 최후의 과제라고 할 ‘선진화, 선진국화’를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미투(Me Too) 운동, 적폐청산과 주류교체, 한반도운전자론을 기반으로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종전선언-평화협정으로 이어지는/이어져야하는 정세의 진전 등은 모두 우리 국가사회가 ‘선진화, 선진국화’를 향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자존감 회복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의 자존감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요소는 문화의 힘, 즉 철학의 힘이다. 이는 일찍이 김구 선생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한 그대로이다.

오래 산 것이 욕이 되는 사회야말로 불행한 사회이다. 4050세대가 2030세대에 대하여 ‘꼰대질’이나 ‘완장질(갑질)’을 그만두고(이것은 스스로 자존감을 가짐으로써 가능해진다), 문화인으로 귀감(롤모델)이 되며, 6070세대의 삶과 연륜이 문화의 힘으로 발휘되는 선진사회(이것 또한 자존감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해진다)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세대 간 갈등이 심화 확장되는 길로만 걸어온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종식시키는 길이다. 그 길 어디쯤에 ‘늙은이’는 복된 장생과 연륜을 향유하며, ‘젊은이’는 미래로 열린 무한한 가능성을 희망으로 채워나가는 ‘행복한 세상=지상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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