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이석우 기자) 산과 들이 꽃잎으로 뒤덮였다. 산수유가 노랗게 웃는 가운데 산벚나무는 눈송이 꽃잎을 지운다. 언제부터였을까 창꽃은 갈참나무 아래서 연분홍 볼에다 수줍음을 얹고 있다. 꽃이파리가 대수던가 모든 나뭇잎이 자신만의 빛깔로 잎새 꽃잎을 펴들고 자신의 봄을 구가하고 있다.

6.25 전쟁 중에 전선에 투입된 학도의용군은 모두 2만 7700여 명에 이른다. 그리고 후방 전투지원군도 20만 명에 달한다. 당시 학제는 중학 6년제였으니 이들은 모두 중학생으로 군번과 계급장도 없이 교복 차림으로 조국을 구하겠다고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 뛰어든 것이다. ‘만17세 소년’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핑 도는 꽃다운 나이에 그들은 펜 대신 소총을 든 것이다.

6.25 전쟁 기념관에는 1955년 문교부와 중앙 학도 호국단이 발표한 『무명(無名) 전몰 학도 학교 명단』이 걸려 있다. 전국 349개 중학교 출신 1,976명의 학도병 전사자를 동판에 새겼다.

군산 중학교가 97명, 경북 중학교 53명, 전주 북중학교 52명, 경주 중학교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 중학교 45명, 군산 상업 중학교 각 45명, 순창 농립중학교 37명, 서울 중학교 30명 순이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이 편지는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의 부치지 못한 편지이다. 전사 직전에 쓴 것으로 그의 품속 수첩에서 발견되었다.

1950년 8월10일 남하하는 조선 인민군과 대한민국 제25연대 및 제3사단 학도병 사이에 포항전투가 시작되었다. 8월11일 새벽 3시 북한군과 우리 학도병 71명이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고 몸을 이빨로 물어뜯는 백병전까지 전개한 전투는 오후 2시 30분쯤에 끝났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학도병은 48명이 꽃잎처럼 목숨을 떨구었다. 그 속에 이우군 학도병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 또한 순창의 농림 중학교 출신 학도병 37명도 목숨을 함께하였다.

학도병은 서울시내 각급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 200여 명이 수원에 모여 1950년 6월 29일 ‘비상학도대’를 만들었고 이들 일부는 교복을 입은 채로 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아 한강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7월 1일 대전에서 ‘대한학도의용대’를 스스로 조직하였다. 국군으로 참전하는 학도들이 줄을 이었으며, 여학생들도 간호원으로 참전하였다. 학도의용병들은 대구로 내려가 다시 조직되어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 부대에 편입되어 낙동강 방어선에서 계급도 군번도 없이 참전하였다.

북한 인민군에는 원래 17세의 소년병이 많았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남한 점령지에서 인민군 학도병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다. 남북의 소년병들이 전선에서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소년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묻었으나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하였다.

슬픈 한국전사여! 역사의 칼날이여! 꽃다운 17세 소년병은 어디로 갔나요. 이 17세의 화혼(花魂)을 어찌하오리까? 봄바람이여! 시든 꽃잎도 함부로 흔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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