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서원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시련이 찾아온다. 아마도 이 세상에 고난과 역경을 만나지 않고 살아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누구나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세파에 시달리며 고난을 극복해 온 자신만의 인생 역정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비록 자신의 과거가 매우 힘들고 불행했던 삶으로 기억된다 하더라도 개인의 삶에서 다양한 시련 극복 과정은 참으로 값진 것이다. 누구라도 그 과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젊어서의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고 했다. 이와 상대적인 뜻은 흥진비래(興盡悲來)다.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일이란 돌고 도는 것이니 고생을 겪어 본 사람만이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행을 미리 대비하여 막을 수 있다.

인간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극복하여 미래의 삶에 유익하고 좋은 일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청각 장애를 극복한 악성(樂聖) 베토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늘이 큰일[大任]을 맡기기 위해서는 먼저 시련을 겪게 한다더니 베토벤의 일생이 그러했다. 젊은 시절에 귓병이 악화되어 잘 듣지 못했기 때문에 평소 유서를 써 놓을 정도로 절망감 속에서 살았고, 가족 문제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끊임없이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불굴의 의지로 역경에 맞서서 인간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치명적인 청력 상실을 오히려 음악의 심오함으로 승화시킨 일이다. 그는 온갖 시련을 적극적으로 극복해 내었고 고통스러울수록 한층 더 창작욕을 불태우며 장엄한 <교향곡 제9번>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 대하여 후세 사람들은 고뇌를 극복한 환희의 표현이라고 평한다. 베토벤은 청각을 잃으면서 사교 대신 독서와 사색으로 음악적 깊이를 더하는 데 노력했고 악상이 떠오르면 메모를 남기는 메모광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자기에게 닥쳐온 불행과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승화시킨 것이다. 로맹 롤랑은 베토벤을 일컬어 자신의 운명과 고뇌를 극복한 승리자라고 평했다.

독일 라인강 주변의 고풍스런 도시 본(Bonn)에 있는 뮌스터 광장에는 베토벤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곳에서 좁다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노란색 목조 건물인 <베토벤 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베토벤은 이 건물 3층 지붕 밑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로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활동하고 그곳에 묻혀 있지만, 이 생가에는 그의 자필 악보와 초상화를 비롯하여 생전에 연주하던 오르간과 비올라, 피아노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그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가 사용하던 낡은 피아노의 움푹 팬 건반이 유난히 눈에 띄어 감동을 자아낸다. 이는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연습의 흔적으로 남겨진 베토벤의 손가락 자국이라고 한다. 생가 박물관 밖의 조그만 정원으로 나와서 그곳 가장자리에 서 있는 베토벤의 흉상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열정적으로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손가락 놀림과 곱슬머리가 중첩되어 떠오른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도 처음에는 연주가 불가능한 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다가 19세기 독일의 음악가 바그너의 혜안과 노력에 의해 불후의 완벽한 걸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걸작의 탄생은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던 온갖 고난을 극복하여 예술로 승화시킨 결과다. 베토벤이 악상을 정리하던 중 스트레스로 인하여 괴성과 함께 책상을 두드리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때로는 머리에 물을 뿌려서 열을 식혔다는 행동은 유명한 일화다. 베토벤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기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바쳐져야 한다고 믿으며, 가장 뛰어난 사람만이 고뇌를 통하여 환희에 이른다는 명언을 남겼다.

내가 처음으로 방문한 독일의 도시는 베를린이다. 분단국 국민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무너진 베를린 장벽 사이의 철조망에 매달려 전시된 벽돌 부스러기를 가장 먼저 찾았다. 지금은 사라진 베를린 장벽. 학창시절에 사진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던 그곳은 늘 낙서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찌 보면 낙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뛰어난 미술 작품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 낙서들은 자유를 갈망하던 독일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장벽을 넘다가 쓰러진 자리에 세워 놓은 십자가와 묘한 대조를 이루던 거리예술이었다. 무너진 장벽의 조각들인 그 벽돌 부스러기에는 지금도 여전히 자유와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내용의 그림과 글들이 선명하게 남아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 외에도 도심 곳곳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남겨 두어 교훈으로 삼고 있다.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을 찾아가서는 독일인들의 강한 역사의식과 고난 극복의 정신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완전히 무너지던 날,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모여든 군중들이 승리의 여신 아래로 울려 퍼지는 ‘환희의 송가’를 일제히 따라 부르며 감격스러워하던 영상을 잊을 수가 없다. 고뇌를 통하여 환희에 이르는 베토벤의 이상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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