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띠 스피리투스 버스 터미널과 시내를 이어주는 다리. 마요르 대성당과 함께 마을 진입로에서 주렴 역할을 한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비아술 버스는 정류소마다 20분 넘게 쉬었다 출발하곤 했다. 버릇처럼 화장실 들르다가 건너뛰었더니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참았던 걸 비우기 바쁘게 허기가 밀려들었고, 두리번거렸지만 근처엔 먹을 걸 파는 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손 가리개 하고 살폈더니 길 건너 조그만 가게가 보였다. 먼지 날리는 길가, 좁긴 해도 피자며 주스가 얼핏 보여 허겁지겁 달려갔다. 이르마란 허술한 가게서도 줄을 서야 해서 짜증이 치솟는 순간 그라시아스, 모멘또! 라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눌러 쓴 모자 아래로 드러난 아가씨, 입술과 눈매가 시원스럽다. 일하다 잠깐 시선 마주친 그녀에게 상띠 스피리투스 명소가 어딘지 물었고, 야야보 다리 건너보면 안다고 말하곤 손님맞이에 몰입했다.

아가씨 재빠른 손놀림 덕분에 얼마 안 가 내 차례가 돌아왔다. 노릇노릇 구워져 향긋하기까지 한 피자며 시원한 망고주스 값은 와플 한 개랑 비슷했다. 얇은 종이에 얹어 파는 토핑 없는 피자지만 배고픈 사람에겐 보약보다 값지다. 그녀에게서 받아든 피자는 망고 주스 도움을 받아 손바닥 위에서 위장으로 잠시 만에 위치를 바꿨고, 빈 컵과 함께 돈을 건넨 순간 무차스 그라시아스! 라는 또렷한 대답이 다시 들렸다. 몇 마디 말에 드러난 그녀 성품을 알아채고 스페인어 배우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가게 이름 이르마가 얼마 전 쿠바를 휩쓸고 간 허리케인이란 사실이나 체할까봐 걱정스럽던 것마저 까마득 잊혔다. 버스 출발 시간이 되어간다는 걸 알고 노트를 내밀었다. 사인 받아 터미널에 돌아오니 버스는 곧바로 출발했다. 피자 가게 주인 유리아 얼굴이며 목소리가 별빛 군무와 어울린 차창은 혼란스러웠다.

젖과 꿀이 흐를 거라 믿고 스페인 이민자가 정착한 상띠 스피리투스. 다시 찾은 소담스런 풍경 속엔 1514가 여기저기 적혀 도시 생겨난 연도를 알리고 있다. 로스 빠라도스 공원(LOS PARADOS PARQUE) 곁 아라비아 숫자 1514가 간판을 대신하는 레스토랑엔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다. 번잡하지 않은 공원 계단은 다리 아픈 사람 오르내리기 쉽게 촘촘하고, 햇살이 미리 데워 놓은 초록색 벤치는 온돌방 못지않다. 번화가 한가운데 자리한 우체국엔 학생부터 노인까지 편지를 부치고 돌아간다. 사랑에 달뜬 연인이 피운 꽃으로 상띠 스피리투스 노을이 더 붉고, 흩뿌려 놓은 웃음에는 천리향 향기가 넘실거린다.

버스 터미널과 시가지 잇는 야야보 다리(PUENTE YAYABO), 젖과 꿀이 흘러서인지 이름마저 앙증맞다. 진천 농다리나 광한루 오작교처럼 아기자기해서 나름 멋스럽기도 하다. 평평하게 만들면 쉬웠을 걸 굳이 아치형을 고집한 사람은 누굴까. 다리 양 옆 등대 모양으로 세운 탑 두 개엔 길 잃지 말라는 듯 가로등을 켜 두었고, 입구엔 구색 갖추려는 듯 선술집 TABERNA YAYABO도 있다. 쌓아 올린 벽돌은 선술집 거쳐 간 사람 숫자를 나타내는 듯하고, 그들이 흩뿌린 애잔한 얘기가 젖과 꿀에 섞여 흘려내려 야야보 다리를 국가기념물로 지정되도록 했나 보다. 쿠바의 아름다움에 취해 글 썼을 헤밍웨이도 비틀거리며 여길 거쳐 갔지 싶다. 언제 들렀나 싶어 물어 보려고 해도 닫힌 문은 꼼짝 않지만 빼어난 내러티브만은 붙들어 둔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상띠 스피리투스에 또 하나 명물이 있다는 말에 시가지를 더듬어나간다. 맞닥뜨린 골목 높고 푸른 종탑이 우뚝하다. 설마 여긴 아니겠지, 하며 허리 꼬부라진 노인에게 다가가 물어본다. 그는 1522년에 지어진 마요르 대성당이 바로 여기라고 꼬부라진 글씨로 설명해 준다. 밤이면 불 밝힌 종탑이 마을을 지켜준다는 말과 함께. 나무로 대충 지었다가 1680년에 돌을 쌓아 완공시켰다는 성당, 마을은 자그마해서 예배하러 오는 사람 적은 탓에 오래된 선풍기가 빈 자릴 메우고 있다. 천장 트러스는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구조여서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듯하다.

시가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선 골목은 동화 속 세상에 뒤지지 않는다. 컴퓨터 그래픽처럼 장식한 담장 조각품이며 무늬 넣어가며 깔아둔 몽돌 바닥은 애니메이션 홍보 영상을 찍더라도 손색없을 정도다. 집 몇 채를 지나치는 동안 파스텔 톤 칠해진 건물 대문께 앉은 소녀 손 흔드는 걸 아쉬운 듯 스치면 마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쓰이는 예쁜 슬래브 집이 보인다. 대문에는 쿠바노 전통 윗옷을 뜻하는 LA GUAYABERA 글귀가 적혀 있다. 마당에 들어선 순간 대문에 적힌 게 거짓 아니라는 듯 하얀 티셔츠며 나무 조각품이 실내에 걸려 있고, 뜰엔 아들 딸 손잡고 몰려나온 가족들로 북적거린다. 테이블 위 케이크 글씨를 읽어보니 다섯 살 아이들 생일 잔칫상이다. 그런 건 아랑곳없다는 듯 거리낌 없이 웃고 뛰놀기 바쁜 아이들이 일으킨 먼지가 안개 커튼을 드리운다.

마당 끝 높다란 담장에 서서 바라본 야야보 다리며 선술집, 고즈넉한 저녁 수채화 품고서 안개 커튼 건너 흔들리는 모습이 몽환적이다. 잔칫상으로 배불린 아이들이 놀이에 지쳤을 무렵, 환하게 켜진 마요르 대성당 종탑 불빛이 그들을 동화 속 세상으로 데려간다. 그럴 때 야야보 다리와 선술집은 현실 세계와 미지의 공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아름다움을 속 깊이 감춘 상띠 스피리투스, 마요르 대성당에다 야야보 다리가 주렴(珠簾)처럼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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