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겸

봄이다. 꽃 향에 취해 눈을 감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몸 가득 봄을 느낀다. 수풀 사이에서 삐죽삐죽 내밀고 올라오는 새싹들. 나뭇가지에는 연한 잎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진달래, 개나리도 보이고 옻순, 두릅, 홑잎이 온 산에 가득하다. 언 땅 뚫고 나온 새싹들이 참으로 대견하다. 바람이 분다. 산이 춤을 춘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돋아난 쑥이 예쁘다. 어쩜 이리 파릇파릇할까. 털이 숭숭 난 줄기 사이로 수줍게 돋아난 새순들이 초록이 아닌 연두여서 맘에 든다는 등의 감탄사를 연발하며 우리 다섯 자매가 나지막한 마을 뒷산에서 쑥을 뜯고 있는 중이다. 우리 자매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 삼아 쑥을 뜯으러 간다. 일 년 먹을 간식거리를 만들기 위해, 어머니에게 봄이 왔음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손을 놀리다 보면 뾰족하게 가시가 돋은 쑥 대공은 새끼들 못 뜯어가게 보호라도 하는 양 아가들을 가리고 가시를 발사한다. 가시에 찔려 아픈 줄도 모르고 쑥이 바구니에 모이는 기쁨을 누린다.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다가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면 달랑 홀로 앉아 있다. 갑자기 “둘남이 어디 있니?” 자매들 이름이 하나둘 불린다. 부름에 답하고 어머니 옆으로 가면 쑥 밭을 양보하시고 또 많은 곳을 찾아주시기 바쁘다.

쑥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없는 살림에 당신 딸로 태어나서 잘 먹이지도 못해 미안하다 하시지만 우리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에 시골 살림이었지만 직접 만든 간식이 가득했다. 미숫가루에 쑥을 넣어 생목이 오르지 않게 해주셨고 겨울철에는 콩, 깨, 땅콩, 해바라기씨를 넣은 강정을, 고구마 맛탕을 달고 살았다. 일 나가실 때면 자식들 굶주릴까 봐 찰밥을 찬장에 넣어 놓고 가셨고 우린 찰밥을 수저로 크게 떠서 손에 들고 다니며 먹었다.

농사로 바쁜 와중에도 연한 쑥 낫으로 쓱싹 베어 오시면 다듬고 삶아 절구에 찧어서 개떡을 만들어 일곱 아이들 입에 넣어주시며 오물오물 먹는 입이 예쁘다 하시던 어머니. 어머니가 내 어머니여서 난 얼마나 행운아인가. 셋째 동생은 아이 낳고 젖 먹일 때 배가 자주 고파서 어머니가 해주신 쑥버무리를 보온 밥솥에 넣어 놓았다 수시로 먹었다고 한다. 아주 어린 쑥에 날 콩가루를 입혀서 된장국을 끓여 주시면 이 또한 별미였다.

쑥이 바구니를 채워 갈 즈음이면 어머니의 판소리 비스름한 창 소리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한다. 어머니의 애절한 아리랑이 울리고 딸들은 어머니 신세한탄을 듣는다. 불구 남편 만나 한평생 호강도 못하고 새끼들 먹이고 입히다 보니 좋은 시절 다 갔다고나. 이제는 어딜 가고 싶어도 다리가 아파 갈 수 없으니 어찌할까? 외할머니가 세 살 때 돌아가셔서 서모에게 자란 아픔을 이야기하시는 대목에서는 우리 모두 눈물바다가 된다. 아프다.

딸 다섯에 막내로 아들 쌍둥이를 낳으신 어머니.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했던가? 우리 집이 그랬다. 불구이신 아버지와 많은 식솔 거느리고 사시느라 안 해본 일 없이 하며 살아오신 한풀이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어머니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 자식들은 비바람 부는 언덕에서도 꿋꿋이 설 수 있었다.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도 김치며 나물 무침이며 온갖 밑반찬을 아직도 나르는 날 보면 난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다음 생에 어머니는 날아다니는 새로 태어나고 싶다 하시지만 나는 어머니가 나라의 공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이제는 자식들 사랑받으시며 한 맺힌 아픈 아리랑이 아니라 행복한 아리랑을 부르실 수 있도록 해야겠다. “내년에도 쑥을 뜯을 수 있을까?” 어머니의 물음에 우리 딸들은 “당근이지”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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