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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치비화(21) 일제, 완벽한 조선 지배 기틀 마련 위해 막대한 자금 투입
조선통치비화(21) 일제, 완벽한 조선 지배 기틀 마련 위해 막대한 자금 투입
  • 박장미
  • 승인 2018.04.29 2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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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新政)의 취지에 대한 선전과 여러 시설
사이온지긴모치(西園寺公望·1849~1940)는  4차 이토 내각에서 이토 히로부미 총리 임시 대리를 맡았다가 나중에 이토가 단독 사임하면서 내각 총리 대신 임시 겸임을 맡았다.
사이온지긴모치(西園寺公望·1849~1940)는 4차 이토 내각에서 이토 히로부미 총리 임시 대리를 맡았다가 나중에 이토가 단독 사임하면서 내각 총리 대신 임시 겸임을 맡았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조선통치 정책의 확립(2)

-미즈노 랜타로(水野鍊太郞)의 조선통치 사견(2)

5. 치안유지 및 위생시설

단지 앞으로의 재원으로써 약간 기대할 수 있는 부문이 있다면, 지세를 증가시키는 방안 밖에 없는데, 이 또한 갑작스러운 증액은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가령 증징(增徵)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과세율(천분의 13)에다 4~5부 정도를 늘리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어, 이로 인해 늘어나는 액수는 겨우 4~500만 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오게 됩니다.

지세는 이미 증징(增徵)의 여지가 없다고 전제하고, 증징(增徵)의 여지가 있는 다른 부분의 세로는 개인소득세, 주세, 직물세 등 불과 몇 가지 밖에 없어 조선인의 조세 부담 능력이 매우 궁핍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조선 내 일본인의 조세부담액도 이미 1인 평균 11원여에 달해 있어 일본 내에서의 부담액 1인 평균 12여원과 비교해 볼 때 겨우 1원정도의 차가 있을 뿐으로 너무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고 있지 않는가하는 감이 듭니다.

특히 앞으로 일본인의 조선에 이주와 일본 자본의 유입을 장려하여 이로써 농업, 공업 등 각종 자원을 개발하려 할 때에 일본에 비해 제세(諸稅)의 부담을 늘인다는 것이 결코 이득을 꾀하는 시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그렇게 조선의 재정은 당분간 국고보조금으로 그 결핍을 보충하든가 장차 공채를 발행하여 이를 보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혼슈(本州)에 필적할 면적과 1700만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조선을 통치하고 그 조선에 문화적 시설을 발달시키는데 있어 겨우 1억5000만여원의 예산을 가지고서는 너무나 어렵다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대만의 재정만 보더라도 그 면적이 조선의 1/6밖에 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1921(대정 10)년도 예산액을 보면 1억1500만 원 가까이 까지 계상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일본 내의 상황을 보더라도, 지방비마저 이미 10억 원에 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조선의 재정은 왜 이렇게 빈약해야 하는 것입니까?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을 완벽하게 통치하고, 조선을 개발하여 신부(新附)의 백성으로 하여금 제국정치에 기꺼이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불온 사상가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문화적 통치를 실시하여 우리 정치의 혜택에 흠뻑 빠져들게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조선의 재원이 빈약한 관계로 자연히 중앙정부의 보급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앙정부의 재정 또한 복잡다단하여 여러 갈래로 쓰여 져야 할 곳이 많기 때문에 원래부터 많은 액수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감안해야 할 것이고, 한일합병의 효과를 완벽하게 달성하려면 정부가 이에 필요한 재정 보급을 기꺼이 해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야식자(朝野識者) 여러분들 또한 조선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 번쯤 다시 생각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제가 조선에 부임해온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만, 냉정히 그 실정을 살펴 볼 때, 위에 적은 방침에 기초하여 시정을 펴나가는 것이 제국의 지위를 높이고 반도의 장래를 밝게 하며, 통치정책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좋은 방책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비록 졸견이기는 하나 제가 말씀 드린 정책 중 여러분들께서 참고하실 사항이 있었다면, 저로서는 참으로 다행이며, 간절히 바라옵기는 병합 당시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상기 하시어 반도 민중에게 문명의 혜택을 베푸는 것이 제국의 성운(盛運)을 가져오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921(대정 10)년 9월 대화정 관저에서 기초)
 

일제강점기 조선 통치를 위해 세웠던 조선총독부 건물. 이 건물은 경복궁 긍정전과 현재의 광화문 사이에 서 있었다. 독립 이후에는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완전히 철거됐다.
일제강점기 조선 통치를 위해 세웠던 조선총독부 건물. 이 건물은 경복궁 긍정전과 현재의 광화문 사이에 서 있었다. 독립 이후에는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완전히 철거됐다.

 

▷모리야 “미즈노각하가 1차 예산을 편성하여 이를 타합하기 위해 상경하셨을 때 저도 함께 보좌하여 상경했었습니다. 미즈노 각하는 도쿄에 올라오신 이래 하루도 마음 편하실 날이 없었고, 내외 관민 가릴 것 없이 각 방면의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조선통치에 관한 양해를 얻고자 동분서주하셨습니다.

원로를 비롯하여 각료는 물론 기타 각 방면에서 조선 문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내방하여 의견을 교환하셨습니다. 정무총감 숙소에 내방해 온 사람들만 해도 30수 명이나 되었는데,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일본 내지 당국자들로부터 현금의 조선 상태와 조선통치에 대한 양해 및 동정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정무총감께서 동경까지 올라오신 것은 일본 내에 있는 각 인사들의 양해를 얻기 위한 목적 이외에 내년도 총독부 특별회계 예산에 관한 내각과의 교섭이 또 하나의 주된 용무였습니다.

즉 다음 해 예산을 편성함에 있어 일본 내 일반회계 부문에서도 상당히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세출의 팽창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당시 내각 대신들이 골치를 섞이고 있었던 까닭에, 각의에서 직접적인 발언권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던 조선의 예산을 통과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다음 해 예산은 새 간부가 부임해 온 이래 성명으로 공포한 바 있는 신시정(新施政)을 잘 시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건이 걸린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예산안이 수상이나 오쿠라대신(大藏大臣)의 양해를 얻지 못하게 되는 불가피한 경우가 발생한다면, 총독을 비롯하여 정무총감 이하는 당연히 그 직책을 내놓고 사임하는 수밖에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말씀까지도 하셨습니다.

다행이도 정무총감의 성의가 인정되어 예산의 중요 항목은 거의 전부가 부결되는 일이 없이, 각의를 통과할 수 있었는데, 이는 진정으로 정무총감각하의 지대한 노력의 대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3년 정도 늦게 시행된 항목도 있긴 했지만, 세출부문에서 1억1662만 원이라는 방대한 예산을 따내신 것인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약 4000만 원 정도나 늘어난 액수로 굉장한 증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산을 배정받는 과정에 있어, 정무총감 각하가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점은 비록 재정사정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담배의 전매 및 평원(平元)철도 부설의 착수기간이 연기되었다는 점으로 이들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방면으로 해결 알선하려고 노력하셨지만, 결국 다음해에도 예산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중앙정부로부터 적당히 시기를 보아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고려하겠다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실망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경무기관의 확충과 태형(笞刑)폐지에 따른 사옥비(司獄費)의 팽창, 교육충실, 의료기관의 확장 및 조선인을 위한 상당수가 관직 증설 등,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시행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예산관계에 있어서 정무총감의 노력 중 특기할만한 것은 신 영토, 즉 조선, 대만 사할린(樺太)에 있는 관리들에 대한 재근가봉제(在勤加俸制)를 계속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셨던 점입니다.

당시 오쿠라대신이 신 영토에 적용되고 있는 재근가봉제를 폐지하자는 안을 내어 각의에 부칠 예정이었으나, 이에 강경하게 맞서 대항하시어, 가봉제를 폐지하게 되면 새로운 정책을 시행해야할 신 영토에 인재들이 오기를 꺼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하심으로써 결국 오쿠라대신의 결의를 번복시켰고, 오히려 증봉액(增俸額)에 대해 4할 내지 8할의 재근가봉제을 지급하도록 함으로써 봉급이 늘어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만(台彎) 및 사할린(樺太) 등지에서 일하고 있는 관리들 모두가 미즈노 정무총감께 충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총감각하는 도쿄에 출장 오셔서 엄청난 활동을 계속하셨고, 결국 그로 인해 심히 건강을 해치게 되었습니다.

예산이 각의에서 통과된 12일부터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심해졌고,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독감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국·부(局ㆍ部) 수뇌자들 사이에서도 악성독감이 유행하여 일손이 부족한 때였으므로 총감 각하는 반드시 연내(年內)까지는 예정대로 부임해야 한다고 고집하시며, 20일 출발 차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열이 내리지 않고, 고열이 계속되는 관계로 다시 이타미(伊丹) 의학박사의 진찰을 받게 되었는데, 역시 과로로 인한 독감으로 3주간은 절대로 안정된 상태에서 요양해야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생명까지도 위험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총감 각하는 22일, 하코네(箱根湯河原)로 자리를 옮겨 휴양한 후, 31일 다시 이타미박사의 진찰을 받았으나, 완쾌되지 않아 다음해인 1920(대정 9)년 1월 2일 오소기(大磯)에 있는 장생관(長生館)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 휴양을 하셔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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