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동양일보) 봄날이 가기 전, 벼르고 별렀던 서랍정리를 작정했다. 평소 정리정돈이 태만한 위인이라 비좁은 서랍에 비집고 넣어둔 잡동사니들이 여간 성가시고 불편해져서이다. 그러나 이내 칸칸마다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명함들을 마주하고서는 선택 장애에 직면했다. 헤아릴 수 없는 명함들을 요령껏 분류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기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쓰레기통에 버릴 요량도 아니기에 멍하니 한참을 망설였다. 명함첩을 찾아서 빈 공간을 찾아봤지만 틈은 없었다. 디지털이 일상화된 요즘 세상에 ‘난 이런 사람’이라는 종이 명함을 주고받는 일이 관계 설정의 도태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니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누구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해묵은 명함 쪼가리에 이리 천착하는 모습이 이내 허우룩하다. 허나 깜깜하게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때마다 명함첩을 뒤져 흐릿해진 기억을 소환시킨 경험이 있는 이들은 쉽사리 구닥다리 명함첩을 포기 못한다. 아날로그는 그렇게 우리 일상 한편에 언제고 존재감을 과시한다. 기억의 한계 때문이다. 인연은 기억으로 유지되며 이별은 망각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의 인간관계는 이성과 비이성의 결합이며 기억의 조합이다. 따라서 혈기왕성한 시절에는 성공을 기대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실패를 낮추는 목표로 전환된다. 그러하기에 최대한 통제 가능한 ‘이성적’ 영역에 인간관계를 집중한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이게도 인간이 사회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공동의 기억’을 구축해가는 행위이기에 학연과 지연에 집착하는 비이성적 선택도 기억의 조합에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계의 깊이는 깊지 않을 것이다. 함께한 시간이 곰살맞지 않고 박제화 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과 사회구성원들과의 소통을 통해 공동의 기억을 만든다.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은 사회 일원으로서의 기억은 인간들을 공동체 안에서 거주할 수 있는 연결의 끈이며,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공동 기억을 구축하는 행위라고 분석했다. 우리에게 가슴 먹먹한 세월호의 기억이 공동의 슬픔으로 각인되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틀림없이 소멸된다. 사라지는 공간엔 때론 자의식에 기초한 다른 기억이 저장되기도 한다. 무의식 속 보호 본능이 만들어 낸 기억의 자기중심적 왜곡은 누구도 예외일수 없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진실을 잃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는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질환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지 않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이다. 그것만이 기억의 오류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안이다. 처연한 시대의 기억은 더더욱 그렇다. 우린 너무 쉽게 잊는다. 이럴 땐 기억의 일시적 오류가 아닌 기억의 자의적 유실이다.

우리는 시간을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살아낼 수 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때 삶의 의미는 절대적으로 그 끝에 의존한다. 결말이 좋지 않다면, 우리는 삶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인식하게 된다. 인간이 오늘의 문명을 일구었다는 것을 보면 기억은 매우 효율적인 도구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기억은 개인의 뇌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본디 오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기억은 오류가 없다. 만인의 기억은 조작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직도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세월호 4주기를 떠나보내며 꾸준히 할 수 있는 내 기억의 양심은 내 자리에서 이따금씩 아이들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일, 함께 기억할 수 있도록 이렇게 글을 쓰는 일 뿐이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우리’의 문제를 기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기억의 용량이 허락하는 임계점을 언제 맞닥뜨리게 될지도 번민했다. 지난 시대, 기억의 망각으로 시름의 결이 깊어지면 오류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늘 기억을 더듬거렸다. 한국 사회의 망각된 기억들을 조금이나마 일깨워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늘 상상했다. 그러나 타인과 교류 없는 나만의 기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기억의 오류를 극복하는 일은 우리 시민사회 모두가 기억을 공유하며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 참된 시작은 세월호와 떠나간 아이들을 오류 없이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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