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68)-고령화 시대에 고령자를 생각한다

최한기 초상
야규 마코토(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최한기는 누구인가?

최한기(崔漢綺·1803~1877)는 19세기 한국의 특이한 유학자·실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개성(開城)에서 태어났으나, 10대 중반 무렵부터 평생 서울에서 살았다. 23살 때 생원시에 합격한 후 출사의 뜻을 버리고, 저술과 독서에 전념하면서 재야 지식인으로 평생을 보냈다. 만년에 맏아들 최병대(崔柄大)가 시종지신(侍從之臣)이 됐기 때문에, 최한기가 이른 살이 됐을 때 시종의 아버지에 대한 은전(恩典)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및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을 받았다. 또, 수직(壽職)으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 龍驤衛副護軍)을 받았다. 1877년에 향년 75세 나이로 서거했으나, 사후 15년이 지난 1892 년에 조정에서 학업이 평가받아 도헌 겸 좨주(都憲 兼 祭酒)로 추증됐다.

최한기는 평생 동안 천문·지리·수학·의학·농학·수리·정치·사회·경제·교육 등 다양한 분야를 기철학(氣哲學)으로 아우르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오늘날 그는 19세기 조선에서 ‘기학(氣學)’을 제창한 독창적인 사상가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가 사상가로 평가받게 된 것은 독립 이후의 일이었다.

생전에 그의 사상은 동시대 사람들한테 이해되지 않았다.

양명학자이자 저명한 문장가로 당쟁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그 폐해를 비판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술도 있는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조차 최한기의 약전(略傳)인 ‘혜강최공전(惠岡崔公傳)’를 쓰면서 “공(公; 최한기)의 책을 보니 오로지 기(氣)를 미루어 이(理)를 헤아리는 것만 말하고 있어서, 대개 선유(先儒)가 밝히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 최한기의 학문이 기존의 어느 학문의 틀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최한기는 사상가라기보다 애서가 혹은 저술가로 알려져 있었다. 최한기와 친했던 실학자 오주 이규경(五洲 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19 ‘중원신출기서변증설(中原新出奇書辨證說)’에서, 당시 중국에서 새롭게 간행되고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책들을 열거하면서 그 중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 ‘완씨전서(阮氏全書)’, ‘수산각총서(壽山閣叢書)’ 등이 영의정 조인영(趙寅永)과 최한기 집에 있고, ‘영환지략(瀛圜志畧)’ 등의 책은 최한기 집에만 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최한기가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도정치를 주도한 권신이자 문인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조인영의 그것을 능가하는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최한기가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의 지도 제작·간행을 도와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한기는 스스로 귀한 책을 모을 뿐만 아니라 남의 출판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건창에 의하면, 최한기 집안은 원래 부유해서 그가 좋은 책이 있다고 들으면 값이 비싸더라도 아낌없이 사들이고, 오래 읽은 책은 헐값으로 팔았다. 그 때문에 온 나라의 책상인이 앞을 다투어 책을 팔기 위해 찾아오고, 북경]에서 새롭게 출간되고 조선에 들어온 책으로 혜강이 읽지 않는 것이 없는 정도였다고 한다.

“책을 사는 돈이 너무 많지 들지 않소?”라고 어떤 사람이 쓴 소리를 하자, 최한기는 “만약 이 책 속의 사람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천리(千里)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는 반드시 만나러 갈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무런 고생도 안하고 앉은 채 그것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책을 사는 돈이 든다고 해도 식량을 마련해서 먼 길을 떠나는 만큼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 때문에 집안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고 마침내 저택을 남에게 넘겨주고 도성 밖으로 이사하게 됐다. 1866년 최한기 64세 때에 지은 ‘신기천험(身機踐驗)’ 이후, 그는 ‘명남루(明南樓)’의 호를 계속 쓰고 있다. 이 ‘명남루’가 바로 최한기가 가장 만년의 살던 집의 호로, ‘남쪽을 밝히다[明南]’에서 보아 도성 외각 남쪽의 어딘가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건창에 의하면, “향리로 돌아가서 농사라도 지으면 어떤가?”라고 어떤 사람이 최한기에게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나도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바람이 있다. 내 견문을 넓히고 내 앎과 생각을 활짝 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데,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서울보다 편한 곳이 없다. 그런데 어찌 굶기가 두려워서 시골에 가서 살아야 되겠는가?”

만약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 통신판매가 있었더라면 최한기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 사람의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어느 시골로 이사했을지도 모른다. 해튼 이와 같이 그를 둘러싸는 환경은 변화했지만, 서적에 대한 욕구와 왕성한 지식욕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식을 줄 몰랐다.



●신미양요 때 자문을 받다

‘혜강최공전’에 의하면, 영의정 조인영, 좌의정 홍석주(洪奭周) 등이 최한기에게 출사를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사상을 동시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는 재야학자로서 조정의 고관대작들부터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아들 최병대의 잡기(雜記)를 모은 ‘최병대난필수록’ 중에 ‘오월십망일 강화진무사 정기원 여가대인서(五月十望日 江華鎭撫使 鄭岐源與大人家書)’가 실려 있다. 이것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존 로저스(John Rodgers)가 이끄는 미국 아시아함대와 대치(對峙)하던 강화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최한기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정기원은 조속히 적을 격퇴시키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만 아니라, 여름의 습한 날씨 속에서 노영(露營)이 장기화되면서 질병에 걸리는 사졸(士卒)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고초를 들어놓고 있다. 그리고 최한기의 고명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이미 대원군께 아뢰어 허락도 받았으니, 부디 강화도의 군영까지 발걸음해 주어서, 평소 간직하고 있는 경륜지책(經綸之策)을 피력해주면 고맙다는 내용이다.

사실 그 당시 최한기의 나이 69세였고 아무리 나라의 위기라 하더라도, 또 흥선대원군의 허락이 내려졌다 하더라도,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군영까지 나와서 참모 노릇을 해 달라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최한기의 답장인 ‘가대인답정기원서(家大人答鄭岐源書)’도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병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10여 년 동안 바깥에도 안 나가고 집안의 잡다한 일들은 자손들에게 듣고 있는 형편인데다가, 나이도 벌써 69세가 됐다. 그러니까 결코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의리가 싫어서 평소와 같이 집에 앉아 있으려는 것은 아니다. 여쭙고 싶은 기밀이나 의문이 있으면 내가 아는 대로 대답할 것이고, 쓸 만한 계책이 있으면 반드시 성력(誠力)을 다해 상세히 알릴 것이다. 이 뜻을 대원군[雲峴宮]께 잘 전해드리기 바란다. 내가 서울에 있어야 정신 차리고 꾀와 생각을 얻어서 군국대사(軍國大事)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진영 사이를 분주해 봤자 기력과 정신을 쇠진하고 꾀도 안 나오고 공사(公私) 모두에게 무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최한기는 집에 있으면서 수시로 정기원의 자문에 응하게 됐다.

‘혜강최공전’은 두 사람 사이에서 논의된 이야기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정기원이 최한기에게 급히 사자를 보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을 논의했다.

“어느 날 오랑캐들이 갑자기 모래를 배에 싣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무슨 작정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최한기가 말했다.

“틀림없어, 그들은 식수가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옹기에 모래를 담고 바닷물을 붓고 짠물을 걸러서 맑은 물을 얻으려 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너무 깊이 들어갔으니 맑은 물을 구할 방도가 없어서 장차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과연 며칠 후 오랑캐는 도망쳐 버렸다.

요컨대 최한기는 미군이 모래를 배에 싣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들이 물 부족에 빠져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 때문에 장차 퇴각할 것이라고까지 예측한 것이다.

사실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출항하고 강화도에 이른 미국해군 아시아함대는 일본에서의 선례에 따라 조선의 개국도 쉽게 이루어질 거라고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장기전의 준비가 부족했던 데다가 조선군의 결사적인 공격 때문에 육지에서 충분한 땔감과 물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미군은 강화해협에서 고립하다가 조선에 대해 아무런 외교적 성과도 얻지 못한 물러가게 된 것이다.

혹은 그들을 바다 위에서 고립시키고 스스로 퇴각하게 하는 것까지 최한기가 세운 전략일 수도 있다.

원래 실학자로서의 최한기는 열렬한 개국통상논자(開國通商論者)였고,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에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서양 천주교의 형이상학 및 신앙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거듭 반대했지만, 서양학의 유용성은 인정하고 좋은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나 병인양요, 그리고 이번의 신미양요 때에도 서양 열강들은 하나같이 군함과 우세한 무기를 과시하면서 무례하게 다가오고, 개국과 신교 자유를 요구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협하고, 적지 않는 군민(軍民)을 살상했다. 그 때문에 배외(排外) 감정이 조야에 확산됐다.

세계의 바다를 두루 노니는 상려(商旅)가 최근에 밝혀진 바의 끝머리[支流餘緖]를 빌려와서 백성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화포(火砲)를 바다 위에서 마구 쏘기도 하고, 교술(敎術)을 어리석은 백성을 전하기도 한다. 이래서는 교통이 비로소 열렸어도 머지않아 그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민심의 동요가 원근(遠近)에 퍼지고 있는 것이 다섯 번째 불행이다.(「明南樓隨錄」)

최한기가 보기에 서양의 군함이나 화포 같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기술도 광대한 우주만물의 ‘천지운화(天地運化)’에서 보면, 그 끝머리를 군사에 응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가지고 백성을 위협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서양 각국과의 접속과 교섭이 평화롭고 대등하고 호혜적인 방식이 아니라, 열강의 군사력을 앞세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가슴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언제나 문달을 구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맏아들 최병대는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의 시종지신(侍從之臣)이 됐다. 최한기의 정치사상에 있어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수시로 조언하고 선도(善導)하는 강관(講官)·언관(言官)은 가장 중요시되는 직책이었다. 아들이 바로 그러한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최병대가 시종이 됐기 때문에, 시종의 아버지에 대한 관례에 따라 최한기가 70세가 된 1872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가 내려졌다. 최병대가 아버지의 묘소를 위해 지은 「여현산소묘지명(礪峴山所墓誌銘)」에 따르면 이때 실직(實職)도 함께 주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최한기 본인은 “조정의 은전(恩典)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관례로는 시종 아버지에 대한 추은(推恩)이 으뜸가는 것이다. 이미 최고의 명예를 받았는데, 어찌 벼슬의 유무 따위를 생각하겠는가? 그런 것은 굳이 원하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래도 결국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이듬해 봄에 다시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그는 “또한 숙사(肅謝)하지 않았다(又不肅謝)”고 한다. ‘묘지명’은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언제나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숙사란 새로운 벼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출근할 때, 먼저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숙배(肅拜)하고 사은(謝恩)의 뜻을 표하는 인사이다. 하지만 최한기는 결국 그것을 안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4년 최한기 72세 때에는 다시 수직(壽職)으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이 주어졌다. 수직은 관원이 80세, 평민은 90세가 되면 주어지는 원칙이었으나, 72세의 최한기에게 그것이 주어진 것을 보면 조정의 최한기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신미양요 때 그가 정기원의 자문에 응한 일에 대한 포상의 뜻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최한기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든 포상을 주든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큰 운화(運化)에 승순(承順)하라’

말년의 최한기는 인생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가 1868년 무렵에 쓴 ‘승순사무(承順事務)’라는 초고가 남아 있다.

그는 이 우주 전체가 필경 한 덩어리의 신기(神氣)이며, 그것은 항상 쉬지 않고 운동하고 변화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운화(運化)’라고 말한다. ‘승순(承順)’이라는 말은 사전을 보면 윗사람의 명을 잘 좇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최한기는 거기에 기의 운화(運化)─우주자연과 인간사의 조리· 법칙을 잘 헤아리고 따르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인생에 10세마다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10세 이전에는 한 몸에 지닌 맑은 기운을 승순한다. 하지만 이때는 천지와 사람과 사물의 변화를 잘 모르고 있다. 20세 이전에는 되면 바야흐로 혈기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30세쯤 되면 마음이 바쁘게 움직이고 천지만물의 현상과 부회시켜 귀신(鬼神)·방술(方術)·화복(禍福)·길흉(吉凶) 등에 물들게 된다. 40세쯤 되면 인생 경험의 절반을 넘게 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평상시의 승순하기에 따라서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50세 이후에는 견문도 쌓이고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과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일의 경험도 많아진다. 사람이 나를 따르면 기뻐하고, 남이 다른 사람을 잘 따라도 기뻐하고, 나아가서는 사람이 마땅히 따르지 말아야 하는 일에 안 따라도 기뻐한다.

60세 이후, 승순의 도가 점차 넓고 원대해지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정치와 가르침[政敎]은 모두 절의(節義)에 따라 베풀고, 나라의 전쟁을 화해시킨다면 천지와 사람과 사물의 운화와 경험이 어긋나지 않게 되고, 운화의 가르침이 넓어지고 해를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70세 이후는 몸이 운화에 승순하면 바야흐로 후세에 강장지도(康莊之道)─편안하고 왕성한 도─를 열게 된다.

대체적으로 최한기의 ‘승순’사상에서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만큼 그것이 많아지는 고령 세대의 역할과 행실이 중요하게 된다. 유년기에는 아직 세상만사 만물의 이치를 모르고, 소년기에는 혈기가 넘치고, 중년기에는 자칫하면 미신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조심해야 된다.

하지만 50세 이후에는 옛것을 계승하고 장래세대를 깨우쳐 주는 학문과 사회적 경험도 나름대로 쌓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승순의 도를 넓힌 고령자는 스스로 절의를 지키고 전쟁을 화해시켜 평화를 실현시키고, 나아가서는 후세에 편안하고 왕성한 도를 열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 것이다.



●기준과 양생

최한기는 고희(古稀)를 넘어서 75세까지 살게 됐는데, 특별히 ‘양생’에 대한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서 몸 관리를 잘 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 있다.

‘인정(人政)’ 권25 용인문(用人門) 6 ‘유준무준(有準無準)’이 바로 그것이다.

“기준(準)도 없이 사람을 쓰는 자는 혹 쓰지 말아야 될 사람을 쓸 만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고, 혹 쓸 만한 사람을 쓰지 말아야 될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며, 오직 마음과 뜻[心志]이 내키는 대로 일정한 근거가 없으니, 누가 그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 특히 사람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온갖 일에 기준이 없는 자는 호생(好生)을 알면서도 양생(養生)의 도(道)를 모르고,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알면서도 죽지 않는 법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음식이 정도를 지나치면 속히 질병이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고 기름진 음식 입에 넣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정(情)을 다해 욕(欲)을 제멋대로 부리다가 죽고, 손해를 보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나는 바를 삼가고 가슴속에 담아둘 줄 모르는 것, 이것은 이른바 안다는 것이 준적(準的)이 없는 앎이고, 이른바 모른다는 것이 준직이 없는 모름인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사람의 준적이 있고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준적에는 크고 작음, 허와 실이 있다. 크고 내실이 있는 것은 천인운화(天人運化)이고, 작고 허망한 것은 헛된 마음의 추측(推測)이다.”

그는 사람을 쓰는 일은 물론, 모든 일에 타당한 기준(준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양생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좋아할 줄 알면서도, 생명을 키우는 도를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몸에 안 좋은 줄 알면서도, 달고 기름진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정욕을 제멋대로 하다가 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정욕을 가슴속에 담아둘 줄 모르는 사람―예컨대 요즘 세계를 흔들리고 있는 #Me Too 운동에서 고발당한 아무개 같은 사람이라든가―은 모두 기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앎(知)와 행함(行)이 분리된 사람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최한기는 왕양명(王陽明)과 달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외치지 않았다. 그는 ‘천인운화’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어떤 권위자가 정해 놓은 외부적·고정적인 기준도 아니고, 왕양명이 말한 양지(良知)나 심즉리(心卽理)처럼 내부적·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외부와 내부, 고정과 유동 사이에서 주관과 객관을 아우르는 기준이라고나 할까. 최한기는 바로 그러한 기준을 따라 평생을 살았음이 틀림없고, 양생에도 유의했을 것이다.



●“아들아, 네가 말로써 죄를 얻었으니 영광스럽구나!”

일본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운양호사건 후 1876년 1월에 일본의 군함 5척이 다시 찾아와 조선에게 개국을 요구했다. 조선 측이 그것에 응하지 않자, 일본 군함은 서해 앞바다에 계속 정박하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저 시간만이 지나가던 바로 그때, 최병대는 상소를 올렸다. 그것은 인심이 동요하는 바로 지금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정사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고종도 즉시 현직 대신과 당상관을 소집해 대응책을 강구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최병대는 그때 이미 언관(言官)을 사직한 뒤였다. 전직 언관이 상소를 올리는 것은 조정의 법도와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이하응(李昰應)에게 탄핵을 당하고 익산군(益山郡)으로 유배됐다.

그때 최한기는 아들을 배웅하면서 난색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네가 능히 말로써 죄를 얻을 수 있었으니 가히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화복 따위는 근심해야 할 일이 아니다.”(「惠岡崔公傳」)

최한기는 왜 조정의 법도를 어기고 상소를 올린 아들을 칭찬했을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최병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사소한 법도에 구애되지 않고, 상소를 올려 말로써 그것을 타파하려 했다. 최한기는 그것을 해낸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다.

최한기 만년의 삶과 생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결과가 좋고 나쁨에 개의치 않고, 늘 바른 길을 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사회에 공헌하면서 살고, 다음 세대도 그렇게 살게끔 깨우쳐주며, 장차 밝은 세상을 열게 이끌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고령세대의 몫이라고 그는 주장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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