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역사의 흐름에서 그 유연성이 약화된 시대는 결국 멸망으로 치닫는다. 시대의 유연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계급이동의 탄력성이다. 능력이 적은 자가 자신의 노력으로 도출한 것이 아닌 결과물들을 바탕으로 능력이 더 큰 자들을 지배하면 사회계급이동의 탄력성은 극소화된다. 그런 시대는 역사에서 결국 사라진다. 이것이 역사발전의 준엄한 법칙이다. 사회계급의 선순환(善循環)이 탄력적이기 위해서 필요한 사회제도 중 교육만큼 그 효율성이 뛰어난 것은 없다. 역사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높은 수준의 학문은 사회계급을 변화시키는 가장 올바르고도 순수한 방법으로 기능해 왔다. 따라서 교육제도는 교육기회의 균등이란 개념이 자리할 여지를 늘 유지해야 한다. 교육의 기회가 편중되면 사회가 계급이동의 탄력성을 잃게 된다. 그런 사회는 개혁이나 혁명이란 동맥경화수술을 기다려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교육개혁이 논해지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급이동의 수단으로써 우리 국민들이 인식하는 방법 중 단연 수위는 교육이다. 학군이 좋은 곳이라는 의미는 교육이라는 계급상승의 기회를 더욱 쉽게 제공받는 지역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한 교육이란 개념이 대표하는 경험론적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진학’이 압도적이다. 결국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일이 가지는 기호학적 의미는 계급상승 또는 계급유지이다. 그리고 현재의 교육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은 결국 현재의 교육제도가 사회계급이동의 비탄력성을 고착화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지금의 시대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역사의 흐름에서 퇴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설립된 후 역대의 정권들은 교육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국민들 대다수는 교육제도가 성공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또한 앞으로의 개혁안들도 신빙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왜 그럴까? 혹시 우리나라는 교육개혁이란 개념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것인가?

결론을 먼저 들추어보자면 우리나라에서 교육개혁이 불가능한 이유는 없다. 시간상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과정이 길 수는 있어도 개념상 교육개혁은 어렵지 않게 정립될 수 있다. 다만 하나의 사실에 우리 모두가 동의해야한다는 선제조건이 있을 뿐이고, 그 조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방법을 찾기가 힘들 뿐이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개념과 그 사회적 효과를 본래의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일이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인간 자신에 대한 탐구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탐구이다. 교육수준이 높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존재가치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로써 사회적 현상들과의 관련성이 조밀해 질뿐이다.

교육의 본질적 개념을 바로 세우는 것이 교육개혁의 내용이 된다면 당연히 우리는 학생이 교육의 주체임을 알게 되고 이들이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 가정, 학교 등의 기관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현상적 결과를 교육의 본질로 착각하면 학생들은 교육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 상황에서의 교육은 이미 그 본질적 타당성을 잃고 물질적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남을 이기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학습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남을 밟고 일어서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제도는 패배자를 필연적으로 양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개혁을 가하여 그 기능을 심화시킬수록 그 사회는 심화된 패배자들을 양산한다. 지금까지의 교육개혁안들이 긍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도 교육선진국들처럼 성공적 교육개혁을 우리 손으로 이룰 수 있다. 점수라는 형식으로 줄을 세운 후 사회계급을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침잠하여 삶의 가치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사회에서의 성공이란 사상(寫像)과 더욱 쉽게 대응한다는 간단한 법칙을 깨닫기만 하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훌륭하게 교육개혁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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