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 서원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평생토록 잊지 못할 스승이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행복이다. 수십 년을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훌륭한 스승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내게는 잊지 못할 평생의 은사가 계신다. 불세출의 서예가로서 어두운 시대를 가파르게 살다 가신 우송(又松) 선생님이시다. 당시 서예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지역의 선구적 서예가로 외롭게 활동하면서 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신 분이다.

서예에 흥미를 느끼던 학창시절, 나는 동천(東泉)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우송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틈나는 대로 쇠내개울[金川]을 따라 올라가 서재 송향대(松香臺)로 선생님을 찾아뵙는 일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외경의 순간들이었고, 그 시절 선생님의 가르침은 평생의 보물로 내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다.

선생님께서는 모든 어려움을 안으로만 삼키시고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얼핏 웃음으로 흘리시는 너그러운 분이셨다. 그러나 예술적 고뇌와 교육열은 처절할 정도여서, 문하생들이 송향대에서 무릎을 꿇고 새벽을 맞은 날들이 많았다.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이 밤을 지새우며 써 가지고 온 임서(臨書) 작품을 보시고 한 마디 말씀도 없이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붓을 들어 실연해 보임으로써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셨다.

어육을 멀리 하는, 도인의 금기 생활 속에서 수정처럼 맑은 결정을 이루어 내신 선생님께서는 서예 분야에서 수많은 수상의 기록을 가지고 계셨고, 일본과 중국의 서단에서도 한국의 명필로 추앙받으셨지만 한 번도 제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말없이 겸허를 깨닫게 하였고, 뜰 앞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 송백을 아낌으로써 송향대를 드나드는 젊은이들에게 은근히 지조와 절개를 가르치셨다.

어느 일요일 오후 선생님께서는 법첩에서 상선(上善)과 관련된 한 구절을 임서하신 후, 서법(書法)의 어두운 밤길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에게 ‘율리(栗里)’라고 사호(賜號)하셨다. 무르고 어리바리한 나를 속이 꽉 찬 알밤처럼 여물도록 하고자 하신 뜻이리라. 나의 호는 선영이 있는 고향의 자연 마을 이름인 ‘방까실[栗枝洞]’의 뜻과도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사호식을 마친 후 나는 지금까지 그 호를 가슴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서예 활동을 하시면서 우송 이외에도 낙우도인(樂愚道人)과 무심어부(無心漁夫)라는 별호를 즐겨 쓰셨다. 그 시절 서예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선생님의 지도는 정해진 시간이 지나도 곧바로 끝나는 일이 드물었다. 대개는 운필의 기법이나 서도인의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붓을 들어 버려진 화선지 조각에 낙서를 하면서, 왜 어리석은 듯 도를 닦아야 하는지와 늘 깨끗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곤 했다. 말씀의 깊은 뜻을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했던지 선생님께서는 서체를 바꾸어 가며 여러 차례 ‘청정자비(淸淨慈悲)’라고 쓰시면서 기필과 결구의 기법을 익히도록 하셨다.

청정자비! 스승의 날을 지나면서 옛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청정(淸淨)’은 속세의 번다(煩多)함을 떠남으로써 더럽거나 속되지 않아서 마음이 맑고 깨끗함을 의미하며, ‘자비(慈悲)’는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을 뜻한다. 이들은 불교적으로 더 깊은 뜻을 가진다. 청정은 스님이 지켜야 할 율법인 계율(戒律)을 지키면서 계행(戒行)이 조촐해서 번뇌나 사욕으로부터 벗어나 죄가 없이 깨끗하다는 뜻이고, 자비는 부처나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안락하게 해 주는 일을 뜻한다. 자비는 결국 ‘사랑’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여성적 사랑을 ‘자(慈)’라고 한다면, 거친 듯하지만 웅혼하고 깊이 있는 남성적 사랑을 ‘비(悲)’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박애(博愛) 정신과도, ‘남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 말한 공자(孔子)의 인(仁)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청정자비(淸淨慈悲)’라는 자그마한 행서(行書) 작품을 몇 점 만들어 낙관(落款)하신 후 나에게 특별히 건네주셨다. 그 뜻을 새기면서 십 년 이상만 간직하면 마음에 얻는 바가 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본디 아둔한 나로서는 십 년 세월이 흘러도 깨우치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고도 또 십 년이 지났으니 이십 년 세월을 축낸 셈이다. 예전의 선생님 말씀처럼 이 작품들이 누구에겐가 아주 요긴할 듯해서 조심스럽게 다시 꺼내 펼쳐 본다. 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 주고자 함이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가셨지만, 손수 남기신 금석문과 무수한 묵적들은 후학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영원의 등불이 되고 있다. 중앙공원을 비롯하여 옥산 강감찬 장군 묘소와 진천 길상사, 청풍문화재 단지 등 여러 곳에 남겨진 선생님의 필적을 답사하노라면 다시금 감회가 새롭다. 그래서 옷깃을 다시 여미고 묵념을 올리게 된다. 송향대 앞뜰에서 붓을 잡으시고서는 그 신비로움과 외경의 세계에서 이따금 하늘을 우러러 묵상에 잠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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