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시인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누군가 볼멘소리를 하며 들어선다. 산책을 나가려던 참인데 마스크를 두고 왔단다.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 수준이라 마스크 없이 나갈 수 없는 현실에 ‘화(火)’가 난다고 한다. 시장가는 길목에 가게마다 길가에 내놓은 물건들 때문에 거치적거리고 그놈의 고양이가 밤새 쓰레기봉지를 헤집어 놓았다고 투덜거린다. 도로변 양편주차 때문에 짜증나고 선거철이라 가는 데마다 후보자들이 건네는 명함받기도 성가시다고 한다.

끼어들기를 못 견뎌 보복운전을 하다 큰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층간소음으로 다투다 살인까지 저지르는 뉴스도 심심찮게 듣는다.

이렇듯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생활전반에 걸쳐 ‘울화(鬱火)’가 꽉 차 있는 푸념들을 듣게 된다.

크게 보면 지루한 국정농단의 사태와 정권교체과정을 지켜보면서 온 국민이 집단 ‘화병’을 앓았다. ‘적폐청산’이라는 전 방위적 소용돌이가 몰아치면서 불신과 불통 속에 속을 끓였던 울분이 또 한 번 상처를 덧나게 했다. 문화계 성추행에서 촉발된 ‘미투’운동이 사회적공감대에 힘입어 각계각층의 ‘고발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모양새다. 검찰 내부에서 대검찰청장의 수사압력을 폭로할 정도로 달라진 것은 분명한데 ‘아직도’ 하는 생각에 뒷맛은 개운치 않다.

오랫동안 불신 속에 덮어놨던 사안들이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회의 ‘화증(火症)’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한진그룹 조씨 일가의 이른바 ‘갑질 시리즈’도 한 기업의 부패와 개인적인 일탈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정신문화적 장애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리턴’ 사건에 이어 조현민 전무의 ‘물 싸대기’사건이 불거지자, 이명희 ‘욕설’ 동영상까지 나돌면서 “조씨 일가, 갑질 어디까지 해 봤니”라는 도발적 문구의 ‘만행리스트’가 연일 폭로되며 업데이트 중이다. 오죽하면 대한항공 직원들이 발 벗고 나서서 조씨 일가의 그룹 경영 퇴진을 주장하며 분노의 촛불시위를 이끌고 있겠는가.

피해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그들이 손가락질을 받으며 포토라인에 서고,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위 ‘금수저’라고 하는 그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삶이 무엇이기에, 그들이 세상의 무엇에 대해 그토록 화가 나있기에, 생활의 일부처럼 ‘갑질’을 하며 피폐한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진다.



‘화(火)를 다스리지 못하면 병(病)이 되거나 화(禍)를 입는다.

화병(火病)을 ‘불(火)’의 병으로 표현한 것은 옳다. 불(火)은 자신을 태우고 타인까지 불사르는 악귀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학의 대가, 김열규 교수는 “화병은 한국인의 심암(心癌)으로, 마음속에 기생하는 악성 종양”이라고 했다.

미국정신의학회는 1994년 펴낸 ‘정신장애진단 통계편람’에서 ‘화병’이 한국인에게 독특하게 나타나는 문화연계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의 일종으로 ‘화병(Wha-byung)’을 한글 명 그대로 한국형 신경정신질환이라는 공식용어로 인정했다.

“화는 화낸 사람에게 반드시 되돌아온다. 화를 폭발시킬 때, 그때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라. 화를 내며 보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충고다.

성경에서도 화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더디’하는 여유를 가지라한다.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야고1:19)”

이 좋은 계절, 자신은 혹시 무엇엔가 화가 나 있지 않은가 살펴보고 마음을 한껏 눙쳐서 풀어내자. 주먹을 쥐고 악수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