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래 충북도의회사무처총무팀장

김광래 <충북도의회사무처총무팀장>

어머니- 그립습니다.

김광래 <충북도의회사무처총무팀장>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그 어느 때 보다도 그리움이 사무치고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누구나 잊지 못할 어머니다. 어머니 열 번째 기일도 있었고, 활짝 핀 꽃의 향기가 마치 어머니의 향기로 다가오는 듯 느껴져 그 어느 때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온다.

어머니는 참으로 험난한 삶을 살다 가셨다. 옛날에 촌부자는 고생보따리라고 안 하였던가? 매일 저녁 밤 10시는 되어야 밭일을 마치고 들어오곤 하셨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어릴 적부터 신장병을 앓아 무던히도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하였다. 어머니는 필자를 등에 업고 엄동설한에도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10리가 되는 의사 댁에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녔고, 신장병에 짜거나 매운 음식 같은 것은 금물이라 하여 필자의 음식에 각별히 주의하셨다. 그래서 그런 음식은 거의 못 먹고 지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수업 끝나고 집에 와서 찬장 문을 열어보니 고등어구이가 놓여 있었다. 너무나 먹고 싶던 나머지 어머니 몰래 먹었다. 일을 마치고 온 어머니는 내가 먹은 사실을 알고 부엌에 주저앉아 얼마나 먹고 싶겠냐 하며 그 것 먹으면 죽어 이놈아! 다시는 먹지 마라!”며 대성통곡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소학교도 안 다녀 글자도 모르던 우리 어머니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아셨나 보다. 필자를 교육시키기 위해 6학년 때 서울로, 중학교 때는 청주로 유학을 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서울로의 전학은 신청이 잘못 되었는지 전학도 못 가고 면내 중학교 등록기간도 지나버려 초등학교 6학년을 두 번이나 다니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무척이나 높았던 어머니셨다.

필자의 대학시절, 부모님은 과수원을 팔고 홀연히 서울로 상경하여 작은 동네 슈퍼를 운영하였는데 평소 잔정이 많았던 어머니는 노숙자들이 찾아오면 라면을 끓여 주면서 김치도 아낌없이 주다 보니 어머니 슈퍼에는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기도 하였다.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으로, 이모님들의 기도와 수다방으로 그런 어머니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였다.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과 남을 배려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어느 날 필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은 돌보지 않고 평생을 자식 뒷바라지 하던 어머니도 세월의 흐름 앞에는 어찌할 수 없었는지 치매가 온 것이다. 대학병원을 가겠다고 나간 어머니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온 가족이 비상이 걸려 경찰에 신고하고 수소문 끝에 3일 만에 인천의 한 파출소에서 연락이 와서 찾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건강상태가 갈수록 나빠져 결국 청주 나의 집으로 모시게 되었다. 길눈이 어두웠던 어머니는 집을 못 찾아와 가족들의 애를 참으로 많이 태웠다.

20177, 결혼 60주년을 맞아 인근 식당에 두 분이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어머니를 잃어버렸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전단을 만들어 찾기를 15,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수소문 끝에 공주의료원에서 입원하고 계신 어머니를 찾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지나가던 행인의 신고로 119 구급차에 실려 공주의료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떠돌아다니던 기간에 무척이나 고생하셨던 것 같다. 집에 온 지 며칠 뒤 황달 증상이 보여 병원 진단을 받은 결과 담낭암 말기로 5개월 판정을 받았다. 간단한 처방만 받고 퇴원했던 어머니는 며칠 뒤 한밤중에 뒷목이 아프다며 청심환을 먹고 주무셨고, 그 것이 어머니 80여 년의 삶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마디 말없이 홀연히 떠나신 어머니이기에 더욱 그리움이 사무친다.

어머니 80년 인생에서의 막내아들과 지낸 7개월, 따뜻한 밥상을 차려 드린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삶의 전부를 당신을 희생하며 막내아들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해주신 어머니! 그런 당신이라는 분이 있었기에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엄마! 어머니!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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