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사건을 기록한 사진. 가옥 등이 불에 타 참혹하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대외관계와 언론 결사 취체문제



●선교사와의 융화 접촉

▷야마가미 “한일합병은 이미 합병 전부터 구미제국에서도 문제의 쟁점이었습니다. 따라서 합병 후 조선에 대한 통치는 세계인들의 주목의 대상이 됐던 것입니다. 특히 조선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은 조선인에게 동정을 표하면서 총독부 시정에 대해서는 반항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독립만세 소요가 일어났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다투어 일본의 조선 통치 및 시정의 결점을 지적했고, 이 내용을 낱낱이 선교사들은 본국에 통신했기 때문에, 서양 여러 나라들은 일본에 대해 악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외국신문 잡지에는 아주 심한 비난과 공격의 기사가 실리곤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새롭게 조선통치 임무를 담당하게 됐으므로 걱정과 긴장의 정도가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추측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후 1년 반이 경과했을 때 선교사들의 총독부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됐고, 오히려 선교사들이 총독부를 믿고 의지하는 식으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외국에서의 비평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됐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일본의 사정을 예찬하는 사람마저 나오게 됐지 않았습니까? 이는 총독부 간부들의 대외정책이 성공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되는데, 그 동안의 총독부 방책 및 시책 등을 듣고 싶습니다.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상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즈노 “과거부터 우리 정부는 항상 조선 문제에 대한 대외관계를 의식했고, 한일합병 때에도 각국의 양해를 얻어 이를 단행했습니다. 특히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는 충분한 협상을 거쳤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성공적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극히 예찬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1919년에 3.1운동(소요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외국과의 관계가 매우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여러 나라들은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해 수많은 악평을 일삼았고, 특히 조선에 거주하던 외국 선교사들은 이전부터 일본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각종 악선전을 본국으로 통신하여 미국이나 유럽신문들로부터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게 됐습니다. 더욱이 영국의 멕킨지가 저술한 책 ‘대한제국의 비극’에서는 입에 침이 튀도록 극렬히 일본의 조선통치를 비난했습니다. 또 소요사건 때 일본 관헌이 조선을 압박했다는 것과 수원에서 조선인을 한 방에 감금시킨 채 이들을 총살시켰다는 기사를 미국 신문기자들이 대서특필했을 뿐 아니라, 그 학살 장면까지도 사진으로 찍어 발표한 곳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한 비평은 조선 내에 있는 선교사들 사이에서 거의 모든 악선전을 총망라한 듯 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극심하게 자행됐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문제에 대해, 우선 그들의 오해를 풀고, 일본이 조선에 대해 행한 태도를 외국에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라다카시 수상도 극심한 배려를 하셨고, 우리들이 처음 임명되어 올 때도 특별히 이 일을 걱정하시면서 당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통치를 개혁함에 있어, 과거의 방법을 혁신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 내각에서 가장 심각하게 토의 됐습니다. 이에 하라다카시 수상의 ‘조선통치 사견’ 중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에서는 예수교가 의외로 만연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더욱 만연할 조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교 선교사나 교도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려는 기색이 보이면 관헌들은 이를 일본에 반항 하려는 것이라고 단정하였는데, 이는 다소는 그런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을 것이라고 본다. 이는 우리 측의 하찮은 어떤 오해로부터 생겨난 추측일지도 모른다. 이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꾀할 방법 밖에는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 공이 통감직에 있었을 당시 이 문제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일을 잘 처리했고, 또 데라우치총독 시대에도 이 방면에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과 거의 교섭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인 것 같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총독부가 예수교를 핍박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측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교도가 일본정부에 반항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이 쌍방의 오해로부터 생겨났음은 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예수교 교사나 교도, 카톨릭 선교사나 교도가 이번의 소요에는 한 치도 관계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또한 동등한 입장으로 얘기한다면 예수교나, 신교도 교회조합과 같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 뭔가 알 수 없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인상을 받는데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 원인이 있을 것이고, 깊이 연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작년 미국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도 그가 말하기를 “내가 조선에 있는 감독 해리스(Merriman Colbert Harris, 1846.7.9 ~ 1921. 5. 8)로부터 서한을 받았는데 그가 이토통감의 조치를 극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나도 그들이 미국 조약에 그 관계에 대해서 심층부분까지 파악하고 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현재도 심히 유감이 많다. 또 교육과 종교와는 원래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혼돈 시킬 수 없다는 점에 관해서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조선주재 선교사 4, 5명을 면회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러한 취지를 말하자, 그들 나라에서도 같은 생각이라는 것이었고, 교육과 종교의 혼돈을 피하고자 하는 행정상의 조치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의도 없었다. 그러나 항상 예수교를 압박하는 조치가 비일비재하다며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가며 내게 호소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오해를 근거한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요컨대 교육과 종교를 확연히 구별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 본다. 때문에 그들과의 의사소통을 피하거나, 또는 그들의 심정을 고려하지 않고 강행하는 식으로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신중히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주의해야할 것은 종교에 대해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갑의 종교를 배척하면서 을의 종교를 지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행정상 극히 유해무익한 일이며,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많은 소요의 요인이 됐다는 실례는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야 말로 행정상 가장 필요한 조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이와 같이 하라다카시 수상은 조선 문제에 있어 대외관계에 특별히 신경을 쓰셨고, 특히 조선에 있는 선교사와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함으로써, 그들이 우리나라의 통치 진상을 잘 알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조선에 처음 부임했을 때의 상황은 확실히 선교사 측과 총독부 측 사이에 소원한 간격이 많이 있었고, 의사소통도 잘 안 되는 상태였습니다. 이로 인해 외국으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았고, 일본의 조선통치의 진의에 대해서조차 의구심을 갖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됐던 것입니다. 베르사유 평화회의 때에도 이로 인해 당시 우리나라 대표가 많은 곤욕을 치렀던 듯합니다. 우리들이 처음 조선에 임명을 받고 왔을 때, 사이온지(西圓寺)공은 특별히 외국과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여 앞으로는 외국과의 관계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것에 대한 의혹이나 비난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당부하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 점에 대해서는 부임하자마자 그 순간부터 매우 필요한 사실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들이 너무나 총독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총독정치에 대해 반항하는 태도마저 공공연히 표출시켜 배일선인(排日鮮人)을 비호하고, 심지어는 선동하는 동향조차 있었습니다.

소요가 가라앉은 시점에서 에비슨 박사(올리버 R. 에이비슨: 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6.30 ~ 1956. 8. 29)는 캐나다의 선교사이자 의사이다. 1892년 6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한국에서 체류하며 활동하였다. 제중원의 제4대 원장,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가 주관하고 있던 세브란스 병원 같은 곳은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소굴이 되어 수많은 획책이 그곳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들었습니다. 또한 평양의 숭실(崇實)학교와 같은 곳은 배일학교의 온상지로 불온한 조선인의 은신처가 되고 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선 이러한 일부터 손을 써 이와같이 불합리한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이를 취체하고, 오해가 있는 경우에는 이를 풀어 그들로 하여금 우리 일본제국이 조선에 대한 실상을 양해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모두 인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다과회나 만찬회에 그들을 초대하여 흉금을 터놓고 서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1920년 12월에 제가 조선의 북쪽 지방을 순시했을 때 평양에서 다수의 선교사를 초대하여 다과회를 열었는데, 그 때 저는 아래와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

서울에서 45마일 떨어진 수원(화성군) 제암리에서는 일본군이 도착하여 모든 기독교 여신도들을 교회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이 교회에 모이자, 일본군은 그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여 35명을 학살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영국과 미국의 영사관 직원의 조사로 확인됐으며, 총독 하세가와(長谷川)를 비롯한 일본 당국자들도 이를 시인하였다.

제암리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마을도 불탔는데, 불길이 싸인 집에서 뛰어나오던 주민들은 일본군의 사격과 칼질로 쓰러졌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이렇게 불탄 마을이 아홉 곳이며, 그밖에도 많은 교회가 파괴됐다고 한다. 평양에 거주하던 미국인 선교사 로버츠 목사에 의하면, 정주(定州)에서는 100명이 넘는 한국인이 총살되고 타살됐다고 한다.

열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녀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여학생들이 자기의 조국을 위하여 정열을 쏟아 독립을 외쳤다는 단순한 죄목으로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체형을 받았으며, 또 고문을 당하였다. 어린 소녀들이 꼬꾸라지고 잔혹하게 얻어맞았다. 7세 이하의 어린 소녀들 300여 명이 이미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트윙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한 살짜리 어린 아이가 등에 총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일본군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등에다 총을 쏘아댔고, 도망가는 사람은 쫓아가서 대검으로 찔러서 쓰러뜨렸다.

시위가 시작된 후 3개월 동안에 3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피살되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독립운동을 진압한다는 미명 아래, 문명국의 모든 법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의 군사독재는 문명인의 존경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켄달, 한국 독립 운동의 진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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