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믹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피노키오 조형물. 상징처럼 쓰이곤 하는 코를 눈에 별로 띄지않게 만들어 붙인게 쿠바 아르떼의 특징이다.

(동양일보 김득진 기자) 세라믹 아르떼 전시장 레알 뚜에로사에 들렀을 때다. 로비에선 연필 두 자루를 꺾어 피노키오 팔과 다리 삼은 조형물이 반겼다. 거짓말의 상징이랄 수 있는 코는 보일 듯 말 듯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타일 몇 장을 바꿔 붙이면 암탉이 되는 작품에다 황토기와를 물결치는 미니어처로 만든 조형물을 걸음 옮겨가며 감상한 뒤 점토로 만든 사람 흉상 여럿을 철망 속에 가둬둔 것까지 하나하나 살펴나갔다. 그 순간 제복 차림의 흑인 여자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안내를 해 드려도 되겠느냐고. 그는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한쪽 구석 낡은 책상 앞에서 잡담 나누던 도슨트 중 한 명이다. 필요한 게 없다고 미소 띠며 대답했지만 분명히 뭔가 도움 될 게 있을 거라는 듯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1층 죄다 둘러본 걸 눈치 챈 그는 2층 올라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그때부터 그의 짐작대로 디뎌 밟는 걸음이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회랑을 거쳐 전시장에 들어섰을 땐 까닭 모르게 이마며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조금 전 수입 도자기 파는 곳에서 5년산 럼주 한 잔 얻어 마신 거나 내가 빈속이었다는 것까지 그는 꿰뚫고 있었나 보다.

오비스뽀에서 한 블록 건넌 골목, 가게에 전시해 둔 도자기는 바깥에서 봐도 탐스러웠다. 공산품 귀한 곳인데 저토록 눈부신 장식품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지만 뜬금없이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고, 얼마 전 오픈했다는 가게에 진열된 도자기는 구매 욕구를 팍 꺾어버릴 정도로 비쌌다. 카페를 겸하긴 했지만 가게 운영하려면 유지비가 만만찮을 텐데 스페인에서 수입한 도자기가 팔리기나 할까. 걱정스런 마음에 에스프레소 한 잔 주문한 것이 내 능력의 한계였다. 악마 이빨 갈아대는 소리에 이어 구수한 향기 맡는 동안 한국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면서 그들을 안심시켰고, 보답으로 가까이 섰던 직원이 잔에 깔릴 정도의 럼주를 내게 건넸다. 양이 얼마 되진 않았지만 빈속에 럼주를 마셨으니 식은땀으로 변해 몸 여기저기로 삐져나온 거다.

진땀이 흐르는 데다 얼굴까지 창백해졌지만 도슨트는 내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모른 척 했다. 작품의 모티프가 된 게 무언지 태연하게 얘기하는 데도 정신이 아득해서 귀에까지 와 닿지 않았다. 땀 흐르는 면적은 차츰 넓어지고 창자가 뒤틀리는 느낌이 뒤따랐다. 위나 아래로 뭔가를 쏟아내야 시원해질 것 같아 배를 움켜쥐고 ‘바뇨’ 라 말한 뒤 이리저리 살폈다. 그때서야 도슨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래층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화장실로 달려 내려간 나는 문짝 없는 화장실 변기에 얼굴을 들이댔다. 하지만 속이 비었으니 배만 아플 뿐 막힌 게 뚫리진 않았다. 이러다 낫겠지, 하며 일어서니 명치가 결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억지로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 전시장으로 되돌아갔다. 내려다보고 있던 도슨트가 하다만 작품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랬지만 속이 뒤틀려 그의 목소리에 몰입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인상을 찌푸린 나는 회랑에 놓인 벤치로 걸어가서 길게 누워 버렸다. 잠시 후면 나을 거라고, 고맙단 말과 함께 다른 볼일 보라며 그에게 손짓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 보니 그가 여태 걱정스런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스러운 마음에 몸을 일으켰지만 속 뒤틀린 건 그대로였고, 메스꺼움 때문에 화장실로 달려가 전날 먹은 걸 죄다 토해내고서야 어지러움을 가라앉혔다. 볼일을 끝내고 변기 레버를 눌렀더니 손에 아무런 힘이 가해지지 않았다. 그 순간의 황당함이라니, 도슨트는 그것마저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던지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이며 손과 입을 씻으라고 수도꼭지를 틀어줬다. 그러는 동안 양동이로 물을 받아서 변기 속 오물을 씻어 내렸을 게 뻔하다. 세수를 하고 몸을 추스른 뒤엔 부끄럽고 미안해서 더 이상 머물기가 어려웠다. 고맙단 인사를 그에게 건네고 서둘러 전시장을 벗어났다.

다음 날, 도슨트에게 줄 작은 선물을 챙겨서 레알 뚜에로사로 향했다. 로비를 한참 동안 살폈더니 음영 깊숙한 곳에서 관객 안내에 몰입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방해되지 않으려고 지켜보는 십 분 가량 설명을 이어가던 그가 로비로 되돌아왔다. 그때서야 다가가 아는 체 했더니 걱정스런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지금은 괜찮으냐고 어린 아이 다루듯 쓸어안을 기세로 다가섰다. 나는 인사에 뒤이어 가방에서 꺼낸 초코파이 몇 개를 그에게 쥐어줬다. 그는 임무를 다했을 뿐인데 이런 걸 받아서는 안 된다는 듯 손사래 쳤다. 그보다 전시장 위해 기부금을 얼마라도 내 주면 안 되겠느냐고 에둘러 말했다. 주머니를 뒤진 나는 쥐어진 지폐 몇 장을 손에 얹어줬고, 환해진 얼굴로 그걸 받아든 그가 기부금 서랍에 곱게 쟁여 넣었다. 둘러섰던 도슨트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탄성을 내지르며 손뼉을 쳐댔다.

밝아진 표정의 그와 전날 얼핏 봤던 작품들을 꼼꼼하게 다시 살피면서 세라믹 작품 속에 녹아있는 휴머니티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들 따뜻한 마음이 모여 작품 하나하나가 태어났을 거라 생각하니 쿠바 아르떼의 가치가 새삼 돋보였다. 가슴 두근거리며 계단을 내려온 뒤 로비에 세워둔 피노키오 조형물을 꼼꼼하게 뜯어봤다. 그때서야 피노키오의 특징이라 해도 좋을 코를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게 만들어 붙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아르떼에는 어떤 가식도 덧붙이면 안 된다는 듯, 피노키오지만 상징 따윈 아무 소용없다는 걸 조형물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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