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순 권사의 가족사진. 맨 오른쪽이 수필가인 맏아들 대성(청주벨로체악기사 대표)씨다.
이월순(왼쪽)권사와 이익상 목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이월순 권사 “하나님의 뜻을 더 우선으로 하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1. 50대 후반에 컴퓨터를 배우고, 시를 쓰기 시작해, 회갑 기념일에 첫 시집 ‘풀 부채 향기’(1997년)를 나눠줘서 그 자리가 출판기념회가 돼 축복받았다 했는데, 2년 후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좌절을 맛보았으나 다행히 회복하고, 다시 시문(詩文)에 몰두하여 시집(3권), 시가 있는 수필집(1권), 동시집(1권) 등을 이어 출판했다. 지금도 시를 짓고, 그 원고 수백 편을 고르고 다듬고 있다는 수필가 맏아들의 소개에, 순진하게 웃으면서 대답한 말이다.

시를 누구에게 배운 적도 사사한 일도 없고, 그래서 형식이니 운율이니 기교니 하는 것 생각하지도 않고 시를 썼다. 시의 발단이 ‘감탄의 소리’였다면 이 권사의 시는 그러한 원초적인 토로(吐露)가 그 방법인 셈이다. 그저 쓰고 싶어서 스스럼없이 느낀 대로 써 왔다.

이 권사가 시를 쓰는 뜻과 힘(원천)은 최근간의 ‘왜 나는 그를 사랑하나(이월순 신앙시집, 2016년)’에서 보듯이 하나님 사랑이 시작이고 끝이다.

이 권사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어떤 사람들처럼 예술을 좋아하고, 멋을 부리고 싶고, 여가를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60년 간난(艱難)과 인고(忍苦)의 삶이 퇴적하여 폭발한 분출(噴出)이라고 할만 했다. 이 권사의 결혼 생활 40년은 ‘목사님의 사모’로서의 명예와 영광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남편의 목사 지망과 그 신학교 교육의 과정서부터 가정을 꾸리는 젊은 아녀자로서, 5남매의 엄마로서, 9대 독자의 종부로서,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그 사이에 끼니를 끓이지 못한 일이 자주 있었고, 교납금을 내지 못한 일로 아들딸을 울게 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급기야는 오남매의 둘을 외가에 맡기는 가족 이산도 겪어야 했었다.

그런데도 이익상 목사의 헌신적이고 불고가사하는 사목활동은 계속되고, 그래서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뎌온 전반생은 암울(暗鬱)로 병이 되기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해방의 일대전환이 시작(詩作)이었던 것이다. 그 동인(動因)이 또한 이 권사다운 착한 마음이다.

2. 1996년에 진천우체국에서 컴퓨터 무료강좌가 11월 1-20일까지 하루 2시간씩 있다고 하기에 창피를 무릅쓰고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 딸같이 앳된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으면서 열심히 배웠다. 컴퓨터를 배운 동기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94년에 ‘골다공증’이란 병명을 받고, 마음대로 활동도 못하는데 더 늙으면 혼자서 집만 지키게 될 터이니, 정보통신이라도 해봐야겠다고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가족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할 틈이 없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글로라도 남겨서 저희들 시간 있을 때 읽어 보고, 어머니의 삶을 생각해 보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억 속에 있는 수많은 파일들을 불러내 ‘시’라는 단축키로 하얀 종이 위에 입력해 놓았더니, 막내아들(시인, 연극인) 철성이가 보고 감탄을 하며, 편집을 하고 한 권의 책을 엮어 회갑에 맞춰 출간하게 힘써줬다.(제1시집 ‘풀 부채 향기, 1997년’ 서문 ‘나의 글’에서)

3. “작년 말에 작은누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물었다. 누나 왈, 어머니가 밤에 잠도 안 주무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신다. 그리고 새벽에 시도 때도 없이 잠에서 깨어서는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또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신다. 한 마디로 우리 가족은 밤새 내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한 달에 한번 시골에 근친하는 나에게 어머니가 쓰신 시 20편을 내 앞에 내놓으셨다.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 이내 그것을 읽었다. 나는 그해에 등단하여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터라, 어머니가 60이 되셔서 시를 쓰기 시작한 일이 신기해 보였던 것이다. 20편의 시는 대부분 10대 후반과 40대를 회상하여 쓴 시들이었다. 40대의 시들을 먼저 읽은 나는 잃어버린 과거가 나의 눈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40대는 나의 10대였고, 10대의 나는 교회 사택의 어두운 부엌에 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고 있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엄마, 왜 울어? 엄마, 울지 마—’ 그래도 어머니는 계속하여 울고 계셨다. 그리고 난 어머니의 10대 후반의 시를 읽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세월이 가고… / 친구도 가고… / 애인도 가고… / 그 황홀했던 세월도 가네. //모두 다 떠나 버린 / 이 허허벌판 삭막한 빈 자리에 / 나만 홀로 남아 있네. // 털프덕 주저앉아 / 사방을 둘러봐도 / 아무도 없는 빈자리 // 외로움에 고독을 달래며 / 고개 숙여 불로 보는 / 나의 노래는 // “모두 다 가네 / 모두 다 가네 / 오직 하나 남는 / 그것 위해 / 살아가리라.” (시 ‘빈 자리’ 전문)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내 앞에 나타난 10대의 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28세의 내가 깊은 절망에 허덕이고 있는 10대의 어린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모르던 나의 과거, 나의 뿌리. 나는 시를 통해 다시 어머니를 알게 됐다. (시집 ‘풀 부채 향기’ 중 ‘책을 내면서’에서)

4. 큰아들이 자기가 쓰는 컴퓨터를 가지고 왔다. 나는 고맙고 얼마나 재미있는지 날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옛 기억들을 떠 올렸다. 첫 번의 기억이 내가 자란 고향마을 논둑, 높이 자란 미루나무 가지 위에 있던 까치둥지이다. 까치 소리는 기쁜 소식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셨기에, 나도 희망 속에 컴퓨터를 까치집과 비견해서 처음 넣어본 글이 ‘까치의 뉴스’이다.

논두렁 옆에 홀로 서 있는 미루나무 / 앙상한 가지 위에 둥지 집 하나 / 까치야! 둥지 집 컴퓨터에 / 무슨 파일 저장했니? // 오늘 아침 우리 집 뒤뜰 / 호두나무에 찾아와 / 불러오기 해 주렴? // happy 샬롬! happy 샬롬! / 오- 그래 happy 샬롬!

이렇게 재미있게 컴퓨터와 사귀어 가는데, 5남매가 ‘세진 컴퓨터 586 윈도우 97’을 사왔다. 나는 이 감격을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때부터 날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병이 나면서까지 작업을 했다. (시집 ‘풀 부채 향기’ 중 ‘컴퓨터’에서)

5. 그 후 4년이 흘렀다.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왼쪽 팔다리가 마비됐다. 그러나 어머니는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펜을 놓지 않으셨다. 거실에서 울리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느리고도 느려터진 자판 두드리는 소리!

4년 동안 어머니는 육신의 아픔 속에서도 초인적인 노력으로 글을 쓰셨다. 그것은 마치 육십 평생의 한을 질기게 풀어내는 한풀이 춤과도 같았다. 어머니가 추신 그 춤사위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지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가슴속에 단단하게 응어리져 있던 그 무언가가 스스로 녹아내림을 느낀다.

(제 2시집 ‘내 손톱에 봉숭아 물, 2000년’ 막내아들의 ‘소녀의 꿈, 여인의 절망, 할머니의 노래—어머니의 시에 부쳐’에서)

6. 요즈음 어린이들은 자연 속에서 지내며 추억을 쌓는 시간은 전무하다시피 하고, 메마른 도시환경 속에 파묻혀 시간에 쫓겨 떠밀려 가는 탓에 동시가 사라져가고 있다. 감정이 메말라 가고 추억이 빈약한데 어찌 동시가 떠오를 수 있을까?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고 측은함을 느끼게 한다. 이 삭막한 요즈음 시대에 옛날 할머니의 동시집을 읽으며 잠시나마 흥미 있는 여유의 시간을 가져보길 소망한다.( 3시집 ‘바보 같은 암소, 2006,’의 ‘머리말’에서)

어머니는 유독 동시를 많이 쓰셨다.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이 60세였다는 사실이 동시를 많이 쓰시는 어머니의 성향과 어떤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가끔 생각하여 본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30대 후반 이후이다. 지금은 70인 어머니, 30대에서 70대까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몸에 드러내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이상하게도 늙음 속에서 드러나는 어린애의 뽀얀 모습을 본다. 웃는 모습, 실수하였을 때 더욱 크게 웃는 모습, 뒤뚱 걷는 뒷모습, 장난치시는 모습, 때론 전혀 사회적이라 할 수 없는 기괴하고 엉뚱하고 너무나 자유롭고 익살스러운 몸짓 등등, 특히 순한 똥개를 연상시키는 어머니의 눈망울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흔들림 없이 축축이 젖어 영원히 날 바라볼 양 순하게 열려 있다.

어머니의 동시들은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유년과 소녀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시들을 통해 비로소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닌 , 아빠 품에 안긴 아이, 왈가닥 어린 여자애, 여인의 냄새를 동경하는 소녀로서 바라보게 됐다.

친구야! 가자 / 네 손에도 회초리 / 내 손에도 회초리 / 휙! 휙! 휘갈리며 // 우리 또 가 보자 / 얏! 펄쩍 뛴다 / 파아란 콩개구리. // 이제는 호박잎에 둘둘 싸서 / 우이 부엌 잿불 속에 / 가만히 묻어 두자. // 호! 호! 후! 후! / 아! 맛있다! // 우리 / 내일 또 가자 잉 (시 ‘콩개구리’ 전문, ‘바보 같은 암소’의 막내아들 철성의 발문, ‘저녁 강변에서 부르는 소녀의 노래’에서)

7. 그동안 틈틈이 써 놓은 수필, 수필이라기엔 좀 어줍은 자서전에 가까운 글들을 모아 이제야 마음 밖으로 조심스레 내놓는다. 어쩌면 옛 이야기처럼 귓가로 흘릴지 모르지만, 절실히 공감하는 추억의 문고리를 잡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처음에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그러나 이제 일흔을 훌쩍 뛰어넘은 나이가 된 지금, 세상의 모든 자식들에게, 그리고 인생의 가을로 접어드는 중년과 노년의 동료들에게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제4문집 ‘질그릇, 2009년’의 ‘책을 내면서’에서)

8. 생각할수록 이상한 노릇이다. 내가 지난번 네 번째 책을 출간할 때,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굳게 다짐하고,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4년이 흘러간 지금 또 시집을 출간하겠다고 가족들에게 발표하며, (중략) 나는 늘그막 늦은 나이에 아동문학(동시), 시, 수필, 세 장르에 등단하면서 장르별로 책을 냈다. 출간할 때마다 다음을 기대할 수 없는, 이번이 마지막이 되겠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출간 후부터 얼마간은 도무지 창작이 떠오르지 않고 안식년이라도 맞은 듯 쉬고 있었다. 그러다 4년쯤 흘러가면, 어느 틈에 모아졌는지 한 권의 시집을 낼 만큼 추려진다. 그럴 때면 지난날의 생각은 사라지고 또 출간을 하고픈 생각이 서슴없이 용솟음친다.(제3시집, ‘할머니의 귀여운 젖통, 2013년’ ‘책을 내면서’에서)

9. 신앙시를 많이 써 놓았지만 그동안 출간하지 못했다. 종교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신앙시를 서먹하게 여기고, 동인지에서는 신앙시를 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문학지 외에는 신앙시를 올리지 못함이 안타깝고 하나님 앞에는 너무나도 송구스러운 심정이다.

하나님께서 글을 쓰는 특별한 은사를 주셨는데, 이 달란트를 묵어두고 있으면 이것은 성령님을 섭섭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되어, 이번에는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굳게 마음먹고 신앙시만 추려서 당당히 세상에 내놓는다.(제4시집 ‘왜 나는 그를 사랑하나, 2016년’의 ‘책을 내면서’에서)

권사님의 글을 대할 때마다 아무런 부담감도 없이 그 순수하고 다정한 맛에 푹 빠지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권사님의 삶 그 자체가 아름다운 시정(詩情)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손이 시릴 때 / 따뜻한 손 내밀어 내 손을 잡아 주었고 // 내 발이 시릴 때 / 따스한 신발 신겨 인도하여 주셨네. // 내 눈이 글썽일 때 / 내 눈을 닦아주며 위로하셨고 // 내가 죽을 수밖에 없을 때 / 내 생명 대신해 살려 주셨네. // 왜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 // 그가 아니면 / 나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시 ‘왜 나는 그를 사랑하나’ 전문)

(‘왜 나는 그를 사랑하나’의 강 준형 기독교문인회장의 발문에서)

10. 이 권사가 지은 시 중에 “있는 힘을 다해 살았으니 하나님께서 언제 데려가신대도 여한이 없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노인들이 두 분과 같은 생각을 갖는다면 노인문제, 고령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다. 노인들이 욕심을 버리지 못해 생기는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표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지만, 내 삶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다음 세대와 공유하고 싶은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월순 권사 “저는 평범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찬사를 받으니, 감사합니다.”

이익상 목사 “제가 아는 사람들은 저에게 건강하니까 오지를 다니면서 교회도 세운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니까 건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2011년 5월 달에 은퇴를 했어요. 교단은 만 70이면 은퇴를 하는데 제가 은퇴하기 3년 전에 생각하기를 그래도 나름대로 70년 동안 교회를 섬기고 열심히 했는데, 아직도 못가 본 곳이 너무 많아서 자연유산, 자연비경에 대한 책 2권을 산 뒤 그걸 가지고 다니면서 세계를 구경하러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은퇴 1년을 앞두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성경에 ‘목사은퇴’라는 말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세상 떠날 때까지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잘했던 것 3가지가 진천군사회복지협의회를 만든 것이고, 21세기 목회연구회라고 목회자들의 모임을 만든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21세기 대륙선교회를 만들어 25년째 중국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은퇴를 했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벧엘원을 만들어 교회를 지원하고, 중국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 내일(3.19)도 당장 중국에서 교육을 하고 30일 날에는 헌당식을 해야 합니다. 좀 바쁘게 살고 있어요. 그동안 중국에 76개 교회를 지어 헌당을 했고, 3채를 다시 지어야 하고, 현재 3채의 예배당을 짓고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니까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11.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중계자 역할이다. 한국에 돈이 많은 사람이 있어도 필요한 곳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돈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이 목사가 중국을 왕래하며 중계해주시는 것이 위대한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다. 20여 년간 중국포교에 헌신한 것은 대단한 공적이다.

이익상 목사 “저는 헌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저에게 내려진 복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도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족 중 깐이 족이 가장 가난하게 사는 민족이에요. 거기 가보니 아주 황무지 같았어요. 그 사람들이 예배당을 지어달라고 하는데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런 부탁을 받고 나면 1주일 안에 어디서 연락이 옵니다. 이번에도 개인이 2000만원을 기부해서 예배당을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오지에 교회를 세워달라는 부탁을 받고 오면 누군가는 저에게 기부를 해주더라고요.

12. ‘구름 사이로 다니는 목사’(이익상, 2011년)라는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이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사니까, 이 목사가 다녀오면 선뜻 돈을 내는 사람이 생기는 것 같다. 피땀 흘려 번 돈을 목사에게 선뜻 기탁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오랜 세월 동안 국내에서 목회하는 과정에서, 20여 년 동안 선교활동 하는 과정에서 쌓아온 것일 텐데 이러한 것을 갖춘 분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 이것을 21세기에 접어든 한국, 특히 젊은 세대가 고령자가 절대 기피하고 미워하고 꺼림칙하게 생각할 존재가 아닌, 배우고, 본받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또 하나 그 책을 보고 느낀 것이 이 목사가 지적한 교회 성장이다. 외국인 목사들이 뿌린 씨앗이 열매가 맺었는데, 이제 외국으로 나가서 한국 복음의 씨앗을 나눈다는 점이 한국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원조를 받던 한국이 이제 선교사를 보내 외국을 돕는다는 것 말이다. 따님 가운데 한 분이 결혼도 안하고 중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익상 목사 “제가 은퇴하던 날 가족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때 제가 가족들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목회 활동하느라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고, 5남매가 대학까지 졸업하는 동안 아이들 학교를 찾아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이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함께 살면서 농담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데, 아내는 요즘이 제일 행복하다고 합니다. 잘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내려주셔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13. 이 목사 내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이고 은혜라고 하는데, 그 이면에 혼자서 자녀를 키우고 보살폈던 사모님의 고충과 인내가 절절히 읽혀졌다. 그리고 우리 80대 세대는 모두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그걸 이겨나가는 과정이 대단한 것 같다.

이익상 목사 “제가 살면서 느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저에게 준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하나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일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이대성(맏아들, 수필가) “어렸을 때는 시골에서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오남매의 장남인지라 일종의 중압감도 느끼곤 했습니다. 어릴 때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하나, 우리와 떼어놓을 수 없는 씨앗이요 뿌리인 외할머니의 신앙과 정성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신앙의 손으로 키워졌고, 우리도 외할머니가 키워주셨고, 아버지의 동서(곧 이모부)도 목회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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