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서진석 여사.
고 홍신희 서원대 총장의 생전 모습.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서진석 여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일보와 동양포럼운영위원회는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고령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이번에는 고 홍신희 서원대학교 총장 부인인 서진석 여사, 이익상 진천중앙교회 원로목사의 부인인 이월순 여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편집자>


“저는 1936년생, 83년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70세부터 80세까지는 굉장히 빠르게 흘러간 것 같아요. 13년 전에, 그러니까 제가 70살 때 고인이 된 남편(홍신희 전 서원대 총장)과 살 때는 세월이 그렇게 빠르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 옛날 모두 어렵게 살던 그 시절에 모두 열심히 살았고, 모두 그 생활에 몰두해서 어떻게 세월이 가는지를 모르고 살아서 그랬는지, 시간의 빠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퇴직한 이후 우리 부부는 여행을 자주 다녔어요. 한해에 두세 번씩 외국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빼놓고 거의 다녀봤습니다. 돌아가시던 해에도 베트남을 여행했어요. 그분은 자기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여행 일정도 다 알아서 준비했어요. 출국 전에 미리 여행지에 대해 다 조사를 해서 여행할 때 방문할 도시의 특징이나 역사에 대해 쉽게 이야기 해주곤 했어요.

남편이 현직에 있을 때는 함께 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여행도 잘 다니지 못 했구요. 정년 이후 그때 함께 못했던 것을 보상해준 것 같아요. 자신의 시간을 저에게 내줬던 것이지요. 여행을 하니 당신도 즐겁고 저도 즐거웠죠.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남편은 흐트러진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어요. 아이들이 어쩌다 집에 놀러왔을 때도, 잠옷차림으로 방 밖에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자기의 약점을 잘 노출하지 않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때때로는 어려울 때도 많았어요.

돌이켜 보면, 며느리들한테는 그렇지 않았지만, 자식들에게는 굉장히 엄했어요. 술이나 담배도 일절 하지 않았고, 웃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밖에 나가서는 유머러스한 모습도 잘 보여주셔서 깜짝 놀라곤 했어요.”

—자기 삶의 화두가 남편의 이야기다. 겉으로 자기자랑을 하지 않는 겸손함 속에 그윽이 스며나는 부부애, 평생 사랑하고 존경해온 남편의 추모 속에, 그분의 생존 시절에는 시간이 그렇게 빠르다는 것을 모르고 살다가, 사후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고 술회하는 것은, 아마도 그 부부는 ‘사랑의 포만’으로 시간을 넘어서 살았다는 것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때 함께 못했던 것을 보상해준 것 같아요.’라는 설명도 서여사의 ‘아름답고 행복한 수용’이 담긴, 남편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담은 감사의 술회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금실과 의초 좋기로 소문났던 그들 부부였지만, 동반외출은 퇴근 후와 주말에 영화 관람이나 아주 드문 음악회 정도의 문화생활밖에 할 수가 없었던 시절이고, 특히 공직에 있던 남성들은 하나같이 그 직무에 전념하여 그 ‘일’ 이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할 겨를이 없었고, 여가니 휴식이니 여행이니, 더구나 가족과의 해외유람 같은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시대상황을 말하면서, 남편 퇴직 후의 동반여행을 보상받은 것이라고 행복해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 너그러움인가?

“저는 살아오면서 큰 불만을 느낀 적은 없어요. 그냥 평탄하게 잘 살았구나 생각합니다. 자식들도 잘 컸어요. 큰 아들은 KT 계열 회사에 다니고 있고, 막내는 바이올린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단원도 따로 모집해서 악단을 운영하고 있고, 자신의 재능을 살려 봉사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어요. 모두가 남편의 덕이라 모두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끔 남편이 생각날 때가 있어요. 남편과 아이들과 북적북적 살을 맞대고 살았을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서울에서 음악 하는 막내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서울을 오가며 지낼 때도 몸은 힘들었지만 즐거웠어요.

남편하고 둘이 사는 것도 좋았지만, 그래도 아이들까지 함께 지냈을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키울 때, 미안하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우리 아이들에게 신경 쓰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큰댁의 조카들 교육을 맡아서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조카들이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 아이들을 다 뒷바라지해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 자식에게 온전히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이제는 아이들이 자립해서 나가니까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요.”

—서여사의 시댁, 홍 총장의 고향은 충주시 노은면의 명문대가이다. 홍 총장이 대처에 나와 살았으니까, 그 시절의 방식대로 큰댁 조카들의 교육을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식보다 조카들을 더 마음 써야 했던 것이 그 시절의 의리였다. 그 이야기를 담담하게 술회하는 모습에서, 가문과 동기간 우애를 존중하는 가품과 법도에 산 전형적인 주부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지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하는 서 여사는 역시 대가족의 어머니다운 자품을 간직한 정절(貞節)의 현숙(賢淑)한 여성이다.

“그래서 손주들이 생겼을 때, 더 사랑해주려고 했습니다. 특히 남편이 손녀를 아주 귀여워했어요. 매주 손녀를 보러 가시곤 했어요. 학교에서 운동회를 한다고 하면, 거기도 빠지지 않고 나갔습니다. 아이들이 좀 크니까 손녀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해주셨어요. 그 덕에 손녀는 7살에 음악을 시작하고, 지금도 음악으로 살고 있어요.

친손자에게는 피아노를 선물했어요. 남편의 철학은 아이들이 음악, 미술, 체육을 즐기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체능 쪽으로 많이 도움을 줬습니다.”

-홍 총장은 심성이 비단결 같이 고운 분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교수로 봉사할 때,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 ‘영국 신사(gentleman)’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실천한 인문주의적 교육자였다. 그분이 학생 앞에서 성내고 야단친 것을 본 일이 없다. 상하에 예의가 반듯하고, 친구지간에는 정감이 넘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외손을 보러 주말마다 대전에 찾아가고, 손자의 운동회에 가서 달리기하고 나오는 손자를 끌어안고 땀을 닦아주던 모습을 서 여사는 흐뭇하게 회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 마디 말의 권유보다 바이올린을 선물하고, 피아노를 사주어서 음악인의 앞길을 열어준 할아버지였다고 하는 것이다.

홍 총장은 그런 성정의 인품이었기에, 대학인으로서의 생활을 청주대학교에만 고집했던 외골수였는데도, 연고도 없었던 서원대학교의 위난(危難)에 그 유연한 경륜이 해결사로서 적임이라고 평가되어 교수들의 총의로 초빙을 받아 부임하였던 것이다.

“사실 저는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따로 모임을 가진 적도 없었고요. 그런데 50대 후반부터 이곳저곳에서 저를 불렀어요. 특별한 능력도 재간도 없었지만, 안 나가자니 거만하다고 하는 것 같아서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연수 같은 데를 가느라, 가끔은 자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차 싶었어요. 제가 남편을 혼자 밥을 자시게 한 적이 잦아지게 된 것입니다. 남편이 위가 나빠지게 된 것도 혼자 식사하게 해서 그런가 싶은 가책도 받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적십자라든가 모든 사회활동을 그만뒀어요. 남편이 아프고 항암치료를 받는데 제가 외부활동을 하는 것이 미안하고 죄송했습니다. 부득이 외부활동에 나가더라도 설렁설렁 하게 됐어요. 완전히 집중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위가 나빠지게 된 것도 혼자 식사하게 해서 그런가 싶은 가책을 받았다.’는 마음, 얼마나 남편 위하는 사랑이 뜨거우면 그렇게 생각하게 될까를 살피게 하는 술회이다. 많은 경우 가족이나 측근이 그런 원망어린 말을 하면, 정색을 하고 부인하고 반발하는 것이 상례인데, 서 여사는 스스로 당신 책임론을 말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지정이라 하겠다. 그분들은 그렇게 순애보(殉愛譜)로 노래하면서 살았나보다.

“이제 남편이 돌아가고 나서는 제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을 잡기가 힘들었어요. 장례미사의 끝 순서로, 신부님이 저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면서 인사를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인사하기를 ‘감사하다’ 하고, “남편은 가셨어도 열심히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얘기가 나왔어요. 하느님과 남편의 영구 앞에서, 가족들과 친지 앞에서 약속하고 다짐한 셈입니다. 외손녀가 외국가기 전에 4개월을 함께 지냈는데, 그때 남편 잃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제 무엇을 하며 살까 고민했습니다.

처음에는 성모병원에서 봉사를 하려고 했어요. 마침 ‘꽃마을’이 내수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꽃마을에 가서 말 기암 환자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했어요. 빨래를 해주고, 밥도 못 먹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주는 봉사를 6년간을 했습니다. 남편의 차를 제가 운전하고 꽃마을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운전이 어려워서 꽃마을도 자주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홍 총장 서거 후의 서여사의 꽃마을 말기환자 봉사활동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봉사 중에서 인적 대상의 봉사가 어렵고, 말기환자의 간호가 더욱 어려운데, 더구나 남편을 보낸 직후의 70을 넘은 고령자가 그 힘든 봉사를 6년간이나, 직접 운전을 하여 40km를 왕복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종교적 신앙심과 망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등이 응결하여 보통을 넘는 특수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홍 총장의 서거 13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홍 총장의 초상화가 거실가운데 그대로 놓여 있어서, 마치 부부가 대화하는 것 같고, 홍 총장의 방(서재)은 생존시절의 방식 그대로,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유지되어, 자손들이 들락거리면서 부조(父祖)를 되새기고 가문의 법도를 이어가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가풍임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육체적인 봉사보다는 남편에게 쓰던 돈이 이제 안 들어가니, 그 돈을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여기저기 돕고 있습니다. 상당복지관에 가서도 도울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라도 하니까 기뻐요. 제가 직접은 아니더라도 봉사할 곳은 얼마든지 많잖아요? 앞장서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뒤에서 받쳐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요. 요즘엔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생각과 실천도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참다운 사회봉사를 아는 분으로서 봉사를 제대로 하고 사는 자세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생활에 감탄하는 것이다.

“혼자 사니까 가장 불편한 것이 식사에요. 혼자 먹으니까 맛이 없어요. 아이들이 오면 잘 먹는데, 혼자 식사할 때는 잘 넘어가지 않아요. 그게 조금 불편해요.”

—노년의 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인 소망이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식사일 것이다. 모든 고령자들의 기쁨은 자손이 앞에 있는 것이므로, ‘아이들이 오면 잘 먹는데’도 누구나 겪는 일일 것이다.

“나이 들고 혼자 사는 게 쓸쓸할 때도 많이 있지요. 그럴 때면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음악으로 외로움을 이겨낸다고 할까? 가끔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종교생활을 하니까 아침에는 성경공부도 하고, 성당의 미사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독신자의 고독감을 극복하는 방법에서 서 여사는 ‘승화(昇華)’라는 차원을 터득한 것이라고 보아진다. 홍 총장 생존시절부터의 생활방식의 중요한 부분이 음악예술이었던 것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 건강의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단순하게 살려고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살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복잡하고 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말이 나왔다. ‘단순하게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은 쉬운 것 같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뜻을 아우른 수준 높은 말이다. 사람들은 복잡하게 살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이다. 서 여사는 다 내려놓고 마음 비우고 산다고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대단한 경지가 아닌가? 그분의 모습에서 달인(達人)의 인상을 받는 것은 그런 까닭인 것이다.

“저는 이제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부디 제가 몸이 아프거나 그래서 저에게 돈이 많이 안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파서 병원에 가져다주기보다는 그 돈을 남기고 모아서 좋은 곳에 쓰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서여사의 곧은 자세와 기품 있는 얼굴에는 젊은이 못지않은 뜻이 넘쳐 있는 듯했다. 그분의 아름다운 소망대로 좋은 곳에 봉사하면서 살 수 있는 건강이 이어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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