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이민 가족과 들렀던 핑카 비이하 헤밍웨이 별장. 수렵과 낚시를 즐겼던 그가 책과 함께 동물 박제를 걸어놨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헤밍웨이 별장인 핑카 비이하, 마다가스카르에 가야 볼 수 있는 바오밥 대신 세이바 나무가 있단 말에 솔깃하다. 아바나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교통 불편해서 미뤘더니 거길 들를 가족이 있다고 누군가 알려준다. 브라질로 이민 가서 쓰러지지 않을 만큼 뿌리 내렸다는 사실에다 렌트한 승합차 함께 타고 가는 거니 부담 갖지 말란 말에 맘도 가볍다. 까사 입구에서 십분 기다려 올라 탄 승합차, 민폐 끼쳐선 안 된단 생각에 맨 뒷자리로 숨어든다. 가족이 묵고 있는 까사의 비좁은 골목, 주차하고 나니 한 사람 지나치기도 힘들다. 뒷자리에 몸을 숨겼지만 창밖 내다보는 것조차 미안스러운데, 먼지 날리는 골목 어귀 매연 내뿜는 차를 보고서도 얼굴 찌푸리는 쿠바노는 한 명도 없다. 불안 속에서 견디는 이십 분이 두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때쯤 검게 그을린 가족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삶의 묵직한 굴레를 내려놓고 왔을 텐데 그다지 들뜬 모습이 아닌 건 의문스럽다. 이민 생활이 어깨 짓누른 탓일 거라 여기면서도 에어컨 바람이 덥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페리 터미널에서 바다 건너 핑카 비이하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서먹함을 메우려고 딸, 아들에게 초코파이며 뽀빠이를 쥐어줬다. 성인이 된 자식들과 아내가 지른 탄성을 듣고도 남편은 별 반응이 없다. 사소한 일로 마음 흔들릴 사람이라면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어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허리케인이 불어와도 쓰러지지 않을 듬직함이 고목 같아 한결 마음이 놓인다. 처음 만난 이민 가족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에 흩어져 살아가는 동포들 모습을 유추해 본다. 애니껭 슬픈 이야기가 헛되지 않게끔 가족 모두가 힘 합쳐 뿌리 단단히 내리고 살아가길 염원하는 동안 고국 소식에 목말랐던 그의 아내가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낸다. 요즘 국내 정세가 어떤지, 북한 때문에 불안하진 않은지 물은 다음 문예창작과 졸업한 조카 이야기를 꺼낸다. 작가가 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더란 얘기를 대신하는 그녀 눈망울에 부러움이 일렁거린다. 연이은 질문에도 유난히 짧게 답이 돌아온다는 걸 느꼈는지 브라질 칵테일 까이삐링야로 주제가 바뀐다. 브라질 전통주 까샤샤에다 열대 과일 과라나며 노니를 섞어 칵테일로 만들면 효능이 뛰어나다고 은근한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입이 마르도록 극찬하는 걸 보면 칵테일 효과를 직접 체험해 본 게 틀림없다. 까샤사 구하기 쉽지 않은 한국에선 보드카로 까이삐로스카를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지만 술을 즐기지 않는 탓에 귀한 정보가 반대편 귀로 순식간에 새 버린다.

이야기가 끊어질 때쯤 공사가 한창인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다. 차에서 내려 입간판을 읽어보니 여기가 바로 핑카 비이하다. 헤밍웨이가 낚시나 사냥으로 호사스럽게 지내던 전망 좋은 집이 비좁아선지 별채를 짓고 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서 보낸 제스처에 라울 카스트로가 쿠바로 그를 초청했고, 뒤이어 보스턴의 핑카 비이하 재단에서 헤밍웨이 유품 보관실 짓기 위한 공구며 건축 자재 86만2000달러 어치를 보내왔다. 자재를 잔뜩 쌓아놓은 주차장 곁에선 현지인들이 동원된 공사가 한창이다. 미국의 건축 자재가 쿠바로 들어온 건 1959년 혁명 후 56년 만에 처음이다. 그의 마지막 20년 글쓰기 흔적이 간직된 유품 보관실 공사가 끝나면 9천 권의 책과 수많은 원고, 수천 장의 사진에다 편지까지 보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죽어서도 미국과 쿠바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에 바쁜 헤밍웨이 뜻을 받들어 양국 정부의 힘 합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추가 공사가 필요할 경우 재단에서 돈을 더 내 놓을지 걱정스럽다. 쿠바 곳곳에 나붙은 오바마와 라울의 악수하는 포스터가 뙤약볕에 바래가고 있는 게 상징이 아니길, 50년 넘게 적대 관계를 이어오던 두 나라에 드리운 화해 무드에 트럼프가 찬물을 끼얹지 않기를 빈다.

대왕야자 군락이 여행자를 반기는 핑카 비이하, 박물관 바로 앞 프렌치 빤 나무는 가지마다 색깔 다른 꽃을 피우는데 제철이 아니어서 장관을 보여줄 수 없다며 관리인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청새치며 동물 박제에다 망원경, 책이 잔뜩 꽂힌 책장에다 널따란 침대와 욕실까지 갖춘 건물은 재벌 별장 못지않다. 금수저 출신이면서 소설을 썼다는 것도 배고픈 사람이 쥔 빵을 빼앗아 간 느낌이라 씁쓸하다. 수영장 곁에는 비석까지 세운 야트막한 강아지 무덤이 보인다. 고향에 있을 때 아꼈던 고양이 못지않게 여기서는 강아지를 친구 삼았나 보다. 그를 지켜주던 강아지는 죽었지만 임무는 잊지 않았다는 듯 무덤 속에서도 주인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동물 천국 쿠바에서 애완견을 기르면서도 사냥을 즐기고 청새치까지 잡았다는 사실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박물관을 돌아 나오니 우람한 세이바 나무가 보인다. 데면데면하던 이민 가족이 세이바 나무를 보고 탄성을 지르며 나에게 폰을 건넨다. 누군가로부터 세이바가 바오밥 나무 사촌이란 얘길 들은 모양이다. 액정 가득 들어차는 그들 가족과 우람한 나무가 닮아 보이는 건 삶의 여정이 엇비슷했던 탓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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