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민 영 서원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어느 지역이든 그곳을 대표하는 명소가 있다. 우리 지역의 상징물로는 단연 무심천(無心川)이 꼽힌다. 외지에서 출신 지역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아, 무심천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무심(無心)’이 주는 정서적 의미로 인하여 덩달아 우아해지는 것 같을 때가 종종 있다. 많은 사람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무심’의 뜻을 헤아린다. 주로 가슴 아픈 이의 한숨 섞인 하소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흘러가는 냇물이라고들 말한다.
무심천의 어원을 옛 이야기에 기대어 추정하기도 한다. 다섯 살짜리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된 여인의 애달픈 사연도 모르는 체하며 무심히 흘러가는 물이라는 해석이다. 최근에는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 ‘직지(直指)’에 나오는 ‘무심(無心)’과 관련된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무심천은 심천(沁川), 석교천(石橋川), 대교천(大橋川) 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쨌든 나에게는 추억을 간직한 채 언제나 그저 내 곁을 말없이 흘러가는 정겨운 냇물이다.
무심천은 청주 지역의 남동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남에서 북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월운천, 미평천, 영운천, 명암천, 율량천의 다섯 개 지천이 합류하지만, 그리 큰 물줄기가 아니다. 더욱이 옛날에는 하천 바닥이 인근 평야 지대보다 높아서 범람이 잦았고, 홍수와 도시계획에 의하여 물길이 변경되기도 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오래 전부터 수량이 늘어나고 나룻배라도 지나다니는 규모의 강이 되기를 소망해 왔다. 수십 년 동안 선거 때마다, 지금은 대청호에 묻혀 버린 오가리의 물을 끌어들이겠다는 공약을 들어 왔으니 그런 꿈을 가질 만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무심천에는 배가 뜨지 않는다.
어린 시절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무심천은 물이 맑고 깨끗했다. 물가의 아낙들 빨래터엔 넓적한 바위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물속의 모래알 위로는 산천어들이 떼 지어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이었다. 밤이면 동네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횃불을 밝혀 들고 물고기를 잡아서 날것으로 먹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밤고기를 잡는다고 했다. 전깃불이 드물어서 사방이 캄캄하던 시절에 횃불을 환하게 밝혀 들고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물고기를 모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당시에는 각 가정에 욕실이 거의 없었고 대중목욕탕도 두어 군데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름밤이면 시민들이 무심천에 나와 미역을 감으며 더위를 식히곤 했다. 번거롭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 시절의 낭만이었고 산들바람과 물소리의 시원함이 어우러진 정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규제도 없었지만, 이곳에서 미역을 감는 데는 시민들 나름의 배려와 질서가 엄격히 지켜졌다. 비교적 물이 맑은 상류 구역인 꽃다리 근처는 여탕으로 내어주고 그보다 하류인 모충교 부근은 남탕으로 사용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금의 청주대교는 기차가 지나는 철다리여서 학생들은 무심천 돌다리를 건너 지름길로 다녔다. 맑은 날에는 국어 시간에 배운 소설 ‘소나기’ 속의 소녀가 금방이라도 나타나 물장난을 걸어오는 상상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개울을 건넜다. 물이 불어 무릎까지 차오르는 장마철에는 지각할까봐 동동거리는 중학생들을 등에 업고 물을 건네던 고등학생 형들의 듬직한 사랑과 넉넉함이 있던 곳이 무심천 돌다리다.
교통량이 많던 서문다리는 차량이 통제된 지 오래 되었고 추억의 돌다리는 세월교라는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의 편리와 능률에 따라 변해 버렸다. 횃불 대신 형형색색의 전광판 불빛이 되비쳐 나오고, 바람소리 물소리 대신 스피커에 음악 소리가 흐른다. 그래도 군데군데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물줄기가 여전히 남아 있고 그 주변으로 갈대밭이 잘 보존되어 무심천의 옛 정취를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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