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정(전 청주시장)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구라산은 청주시 내수읍 우산리와 미원면 대신·종암리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며 세계 3대 광천수(鑛泉水)로 유명한 초정리와 인접해 있다. 이 산의 이름은 ‘구라산(句羅山)’ 또는 ‘구녀산(九女山)’이라고도 전해 오는데, 내 집안의 옛날 족보에는 ‘句羅山’으로 기록돼 있다. 이 지역이 삼국시대 국경지역이었고, 인근 마을 비중리에 고구려 불상과 삼국시대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 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句羅山’으로 불리어 오다가 1480년대 조선 성종 때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구라산(謳羅山)’으로 기록됐다. (신라통일 후 칭송할 ‘구(謳)’로 바뀐 것 아닌가 싶다.) ‘구녀성(九女城)’ 또는 ‘구녀산(九女山)’은 일제가 조작한 설화라는 이야기도 있다. 1남 9녀의 남매간에,아들은 쇠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갔다 오고, 딸 아홉은 성을 쌓는 죽음의 내기를 했다는 조작 설화는 전국에 많이 있고, 그것은 조선인의 민족성을 비하하고 개조한다는 일제의 식민통치 수단의 하나였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지도상에 구녀성 또는 구녀산으로 표기된 것을 구라성과 구라산으로 조속히 시정해야 될 것이다.

이 구라산 밑의 마을이 인본(仁本)이었고 지금은 우산리 인평마을이 행정구역 명칭이다. 우리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이 마을에 살았고 구라산 밑의 산 일부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증조께서는 이곳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다. 시문(詩文)에 밝으셔서 문집 3권이 있었는데, 친지가 빌려간 수개월 후 ‘도둑을 맞았다며 자기의 전 재산 전답 5두락으로 보상하겠다’해 책망을 하시고, 단지 ‘망선루(望仙樓)시’ 한 편이 족보에 기록돼 전해오고 있다. 나의 조부와 선친은 문집을 잃은 것을 늘 애석해 하셨다. 망선루 시는 청주 망선루에서 청주의 문인 선비들의 시 경연 대회에서 장원을 하신 오직 한편의 유작으로 귀하게 전해오고 있다.

나의 조부님은 3대 독신으로 증조부께서 일찍 작고하셔서 어려운 집안 사정에 억척스럽게 농사일을 하며, 15세부터 장년들과 품앗이를 했다고 하셨고, 증조께서 서당 훈장이셨음에도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씀했다. 조부님 위의 두 아들에게 글을 가르쳐 5~6세 때 별세해 천하게 키워야 명이 길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글을 가르치지 않아서 조부님은 남이 배우는 뒷자리에서 어깨 넘어 글을 배우셨다고 했다. 어깨 넘어 글을 밑천으로 독학하여 청주향교의 전교(典校)와 몇 곳의 서원장(書院長)을 하셨고 어려서 못 배우고 가난하셨던 연유인지 평생 교육과 지역개발에 많은 노력을 하셨다.

세상 떠나신 후 지역의 향발회(鄕發會)에서 세운 송덕비에 새겨진 몇 가지를 기록하면 이장, 면 협의회의원, 군 평의원을 역임하시면서 비상간이학교 창설과 초등학교 승격에 이르도록 기성회장과 보호회장을 하시며 사전(私田)을 희사하면서 추진하셨고 마을의 공동 경작 농지로 사유지 900평을 희사하고 외인의 논 700평을 연부상환 융자로 매입하여, 공동경작지로 복지와 협동정신을 배양하셨다.

청북수리조합을 창설하여 인평·비상·부연 3개 수리공사에 진력하시어, 가뭄의 들판이 옥토로 바뀌게 됐다.

비문에 “백발단구에 근엄하면서도 온후하고 장자풍(長者風)이면서 지사형(志士型)인 공의 그 모습 지금도 삼삼하다”고 새겨져 있다.

나의 조부모님은 내가 우리 집안의 8대 종손이므로 귀하게 여기셨는데 어렸을 때 체력이 약해서 초등학교 4학년때 목과 무릎 관절염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해 많은 걱정을 드렸다. 약도 먹고 침도 맞았다. 한의사이신 어느 친지분이 백화주(百花酒)가 특효가 있다고 해 조부께서 산천의 100가지 꽃을 따서 술을 담아 작은 잔에 넣어 나를 먹이셨다. 그래서 나의 음주 역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조부님께 배운 것이다. 나는 조부님의 정성으로 5학년부터 건강하게 학교를 다녔다.

나의 선친은 3남 2녀 중 장남이셨다. 나의 조부께서 3대 독자이셨는데 가정형편이 조금은 나아질 때이므로 선친은 보은의 고명한 한학자에게 글을 배웠다. 평소에 조부님의 인자하신 성품과, 지역사업, 종중과 이웃에 대한 배려와 헌신하시는 모습에 감화돼 조부님 하시는 일에 성심으로 조력을 하셨다. 성균관 전학을 하셨으며 효성이 지극해 성균관장으로부터 효자표창패가 추서됐고 청주향교와 충북도 유림회에서 인본리에 효자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생전 사회공헌의 업적으로 충청북도지사와 청원군수의 표창 등을 수여받으셨다.



●가족과 친족관계

선친은 5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나는 관계에 나아가 공직수행에 노력했고 2남은 가사와 지역의 일을 보았고, 3남은 독일 수학 후 그곳에 거주하고 있으며, 4남은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5남은 농업을 하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5녀는 모두 훌륭한 배필을 만나 출가하여, 지역과 문중의 모범 가정이라는 칭송도 받았다.

같은 마을에 친족이 5가구가 살았는데 옛 선비 집안으로 곤궁을 면하지 못해 조부님과 선친이 외지의 지주로부터 토지 관리권을 취득해 친족들에게 전답을 나누어 경작케 하여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하셨다.



●위선(爲先)사업과 종중의 일

선조 2대의 위토(位土)가 없어 10월 시향 때면 곤란을 겪어 전답을 각 600평을 마련해 시제를 모실 수 있게 했고 선영산소에 상석이 오랜 세월에 퇴락이 심하여 제물을 올리기 죄송하게 생각해 모두 개수 정비하셨다.

그리고 안정 나씨 선대의 위국 충신과 위대한 도학문호(道學文豪)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실 홍양사(鴻陽祠·충북도 유형문화재 41호) 중건을 위해 주거용지로 마련한 토지를 희사해 건립함으로써, 청주향교를 비롯한 유림과 지역인사들이 매년 제향을 올리고 학생들의 충효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또한 어느 지방 어느 가문이나 인물이 나야 발전이 있다 하시고, 종중에 장학기금 500만원을 헌납해 그 기금으로 매년 홍양사 제향시 장학금을 수여토록 하셨다.



●지역발전 사업

인평리 마을회관 건설에 부지를 마련하지 못할 때 마을 중심지의 농지를 희사하여 건립케 하였고 인평 소재 논 700평과 초정리 소재 밭 600평을 부락 공동 경작지로 희사해 그 소득으로 마을 재산을 조성하게 했다. 또 100만원을 마을에 희사해 이자수입으로 연 1회 마을 주민이 회식과 놀이로 하루를 즐기며 화합단결을 도모케 하셨다.

그리고 지역 청소년의 체육단련을 위해 초정리에 축구장 부지로 밭 900평을 희사했고 초정과 미원간 산골 도로가 협소한 탓에 교통에 불편이 막심하므로 군과 도에 건의하여 2차선 차도를 건설토록 하셨다. 또한 이 지역은 가뭄이 심하여 실농의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아 농민들의 불안이 심해 인본리 골안에 소류지를 단독 자비로 설치, 한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했고 조부님의 뜻을 도와 군과 도에 교섭해 인평 및 비상 수리조합을 설립, 저수지의 건설로 한발지대가 옥토가 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인평과 초정간 도로가 협소하여 차량통행과 주민들의 불편이 많으므로, 농지를 희사하여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조부님과 선친은 가정사나 종중의 일, 또 지역의 일을 하실 때 항상 상의하시는 모습을 보았고, 어떤 때는 시를 지을 때, 자구(字句)에 관해 의논도 하셨다. 선친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 고향 집에 갔을 때, 부자분의 한시(漢詩) 원고집을 주셔서 두 분의 호를 붙여, ‘송은 송봉 시집’을 간행하여 친족 친지들에게 배부해 드렸다. 유교의 가풍으로 엄격하면서도 자상했고, 부자간에 언성을 높이거나 질책 또는 불평을 하시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조부님은 내가 결혼 후 서울로 전세방에 살림을 나갈 때, “너는 이제 가장이 되는 것이니, 외국이나 국내 장기출장으로 부득이할 때 외는 꼭 집에서 잠을 자고, 가장의 자세를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의 조모님도 평생에 자손이나 이웃과 친척들에게 언성을 높여 말씀하지 않는 조용한 분이셨다. 나의 어머님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독일에 사는 여섯째 동생이 한 살 때 젖 먹이를 남기고 세상을 뜨셨다. 그때는 숙부 내외분 사촌까지 13식구와 광적 농사에 일꾼 세 명이 한 집에 살았다. 그 많은 식구를 베를 짜서 옷감을 만들어 입혔다. 그 일을 어머니 혼자 하시다가 과로로 베틀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고, 4일 만에 돌아가셨다.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고생만 하다 저 세상으로 가셨고 상여 뒤에 선친과 내가 상복 입고 울며 따라 갔던 70여년 전 세월이 어제처럼 눈에 선하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광복이 됐다. 등·하교 시 교실 벽에 걸린 일황신주(日皇神主: 나무상자)에 절하고, ‘대일본제국 신민 선서’ 구절을 외웠다. 그러던 신주를 광복된 날 담임선생이 운동장에서 불을 놓아 태우는데, 귀신이 나오는 것 같아 모두 무서워 돌아섰었다.

4학년까지 책상 없이 마룻바닥에 엎드려 글씨 쓰다가, 5학년 때 처음 책걸상에 앉게 되어 모두가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검정고무신에 무명 바지저고리, 한 겨울에도 내의 없이 코 흘리며 살았다. 광복 전에는 군수용 송진 채취하러 산에 갔고, 쇠붙이는 수저까지 공출로 가져갔다.

시골 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었던 나는 운 좋게 청주중에 입학할 수 있었고, 청주고, 고려대를 졸업했다. 학보병으로 최전방에서 군 복무 중에 4.19혁명이 일어났다. 군 복무 마치고 대학 4학년에 복학했을 때, 제2공화국 장면정부 때 공무원 채용시험이 있었다. 자유당 정부에서는 일반직 공무원은 무시험 촉탁으로 채용해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정규 공무원으로 임용됐는데, 장면정부에서 공직사회를 일신한다는 취지로 대학졸업 또는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1000여명을 공개 채용하고 3개월간 전국 읍·면에 배치해 행정수습을 시켰었다.

나는 충남 당진군 바닷가 석문면에서 수습 중 3개월이 다 되었을 즈음에 국무원사무처의 긴급 출두지시를 받고 국무총리실에서 장면총리를 뵙게 됐다.

각 도에서 1명씩 차출해서 그들의 말을 듣겠다고 소집했는데 갑자기 불러서 시간 내에 당도한 사람이 5명이었다. 총리께서 우리들의 말을 듣고 나서 말씀이 “내가 자유당 정부에서 물려받은 것은 빚 400억 원뿐인데, 국민들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그때 전국 도처에서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집권 민주당은 신·구파로 갈라져 싸웠다. 그 이튿날 새벽에 5.16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한 말처럼 5.16군부 쿠데타는 정치·경제·사회 등 나라 전체의 혼란과 불안정이 부른 사태이었다.

5.16군사정부 이후 정부는 경제개발계획 추진, 새마을운동과 농어촌생활 환경개선, 대외협력과 식량 자급운동 등 국민의 생활안정과 경제성장이 최우선의 국가목표이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나는 내무부 직원으로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 들으며 집에 들어갔고, 농촌지역의 공무원들은 모내기와 퇴비생산, 가뭄대책에 농민과 함께 일을 했다.

1960년~1970년대에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결의로 대학출신 젊은이들도 서독에 광부와 간호원으로, 또 중동의 사막지대에서 근로자로 일을 했다. 그렇게 하여 경제를 일으키고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곳곳에 도로를 건설하고, 자원 없는 나라가 수출 강국으로 발전했다. 또 외환위기를 맞아서는 금모으기운동으로 국민들이 뭉쳤었다.

1960년대 이후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남북분단과 전쟁을 겪은 악조건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제는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만든 그 시대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 일을 했다는 긍지를 느끼는 시대였다.

나는 3개월간의 행정수습을 하고 5.16 군사정부에 의해 고향인 충북에 배치돼 행정서기보로 괴산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고, 괴산교육청을 거쳐 6개월 후에 충북도 문교사회국 한교관리과에서 1년 근무했을 때, 내무부의 전입시험을 거쳐 1963년 1월 21일부터 16년 6개월을 지방행정·재정·감사 ·기획관리·공무원 교육 등의 실무에 종사했다.



●1960~1970년대 나라살림

재정과에서 근무할 때 매월 월급날이 다가오면 재무부 국고과에 가서 지방공무원에게 월급을 줄 지방교부세 자금을 제때에 보내려고 사정을 했다. 국세 징수가 원활치 못해 정부의 특수사업 기금을 일시 전용해서 송금하기도 하였다. 그때 내무부는 전국 지방공무원의 월급, 국방부는 군인 월급, 교육부는 전국의 교직원 월급 때문에, 3개부의 자금 담당자가 재무부 국고과에서 만나게 됐다. 나라의 재정사정이 어려워서 같은 자금담당 공무원이지만 재무부 담당자에게 사정을 하는 입장이었다.



●광산지대 도시의 사활

내무부 특수지역개발 담당이었을 때, 강원도 태백지구 광산촌의 생활실태를 현지조사를 한 적이 있다. 광부들의 주거생활은 너무도 어려웠다. 몇 개의 큰 광업소만이 연립주택이 마련되었을 뿐, 4~5평짜리 단칸방 또는 움막집에서 살거나, 6~7명의 3대가 방 한 칸에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광산촌 정비계획을 만들어 당시 김치열 내무장관에게 주거환경과 생활실태를 사진을 첨부해서 보고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보고돼 대통령지시로 경제기획원과 협조 하에 ‘광산촌정비 3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그런 후 10년 만인 1988년 6월 태백시장에 부임하면서 기이한 인연이라는 생각도 했고, 이 지역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라는 사명이라고도 생각했다.

10년 사이 석탄의 시대는 가고, 석유의 시대가 왔다. 많은 광업소가 폐광이 되고 많은 광부들은 못 받은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시청에서 데모를 했다. 시민들은 극도로 불안했고 태백을 떠나는 시민도 많았다. 정부에서는 법무부장관, 동력자원부장관이 다녀가고 총리가 위원장인 산업구조조정 심의위원들이 다녀갔다.

나는 그분들에게 특별대책을 요구했다. “태백에서 석탄을 채취해 국가산업을 일으키고 국민생활을 보호했는데 이제 이곳에 분진(粉塵)과 폐수(廢水)와 폐석(廢石)만을 남기고 헌신짝처럼 모른 채 방치 한다면 이 나라에 정의가 어디에 있고 국민을 이끌어 갈 국가이념은 무엇인가, 부모가 늙어 일 못한다고 내다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하고 목멘 소리로 역설을 했다. 그리고 근심에 찬 시민들의 모임을 찾아서 “태백을 떠나지 마시오, 10년 이내에 태백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위로하며 외쳤다.

6개월간 태백에 근무하며 정부를 상대로 태백의 경제와 환경재생을 위한 예산 확보에 진력했다. 동력자원부 최명헌 장관과 국·과장들, 경제기획원의 도움으로 그때 예산 264억원을 확보하고, 그 해 12월 말일, 정부의 인사로 태백을 떠나 충북도로 오게 됐다. 태백산 정상에는 시민들의 뜻을 담아 내가 글을 지어 세운 태백산비가 서 있다. 비문의 한 구절 “영산 지하의 탄맥은 이 나라 산업의 원동력이며 천고의 푸른 산림과 풍부한 금속광물과 비옥한 토질은 만물생장의 오행소재를 겸전함이라. 이로써 태백은 음양 조화와 오행상생해 이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보우하니 이 나라 구원의 성지이다.”



●진천군과 영동군에서

나는 농촌태생이지만 농업과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농촌행정의 지역 책임자로서 마을을 돌고 농민들을 만나고 정부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참으로 고민의 연속이었다. 농촌진흥청에 자주 찾아가서 전문 연구원들과 상의도 하고 많은 얘기도 들었다. 나는 우리나라 농업의 근본적인 문제로 첫째는 쌀농사 중심의 영세한 농업형태, 둘째는 가족중심의 폐쇄적 가족영농, 셋째는 전례답습의 비과학적인 영농방법, 넷째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의존한 자율영농의 의지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 나름의 새로운 영농지표를 만들어 함께하는 농민들과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영농지표: 1. 자율영농, 2.조직영농, 3. 과학영농

‘뜻이 맞는 사람끼리 서로 모여 상의하면서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머리를 쓰면서 재미있고 수지맞는 농사를 합시다.’라는 표어를 군과 읍·면 회의실 등에 써 붙이고, 첫째, 정부주도의 영농에서 농민의 자율 영농으로, 소극적 영농관습에서 적극적 개발의지로 바꾸자, 둘째, 고립적 개별영농에서 조직적 영농으로 전환하여 생산기술과 유통정보를 확보하여 생산조절과 협동판매를 추진하자. 셋째, 전문적 생산기술로 생산성 향상과 품질의 고급화 촉진, 기계화 영농과 경영개선을 목표로 했다. 영동군에서는 2년간 추진하여 영농클럽이 7개 분야 22개 품목에 119개 클럽 2,500여 회원이 가입하여 활동 했다.

쌀농사 분야(벼농사, 농기계클럽), 축산분야(낙농, 한우, 양돈, 양봉클럽), 과수분야(사과, 포도, 복숭아, 자두, 곶감클럽), 채소분야(고추, 마늘, 수박, 딸기, 시설채소 클럽), 특작분야(참깨, 약초, 느타리클럽), 잠업분야(잠업클럽), 산림분야(표고, 산채클럽)으로 조직했다.

클럽이 추진하는 사업은 △클럽별 회합·토의 △교육 △견학 △영농 자체평가 △유통개선 △영농기록 △군 영농정보지 발간 △농민 사랑방 운영 등이었다.

영동군은 1차년(1983)에 전국 증산왕 3개 부문 중 2개 부문을 차지해 2명이 산업훈장을 받았고, 2차년(1984)에는 산업훈장 2개 클럽,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 각 1개 클럽, 군수인 나도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충청북도에서

나는 기획관리실장 3년, 행정부지사 2년을 근무했다. 그 기간에 했던 일중 몇 가지 생각되는 것은, 첫째 오창과학산업단지 조성사업이다. 이 사업은 1989년 1월 강원도 태백시에서 고향인 충청북도의 기획관리실장으로 부임하여 도정을 종합적으로 기획관리하는 책임자로서 내가 할 일을 여러모로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본격화되었으나 낙후된 자원빈국의 입장에서 거점 개발전략으로 수도권과 동남해안 공업지대 개발이 우선이었다. 충북은 개발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으로서 미래지향적인 산업화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나는 학계와 국책연구기관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협의를 했다. 그 결론으로 국책연구기관인 국토개발연구원에 ‘청주 첨단기술 산업단지 개발 기본계획 작성’을 의뢰했다. 그리고 핵심 연구원 2명과 함께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대만의 첨단산업단지를 견학했다. 그리고 결론으로 자연과 인간과 산업이 조화된 신산업기술도시건설을 기본방향으로 결정하고 명칭을‘청주테크노빌(Technoville)'이라 하였다. 단지 내에 산업체와 연구소 및 대학을 유치하여 미래의 국제적인 첨단 기술 산업단지로 발전시키고자 추진하였다.

전체 개발면적을 286만평을 계획했는데, 상공부와 협의과정에서 우선 30만평으로 권했으나 나는 대만의 신죽공업단지가 땅값 상승으로 추가 확장을 못한 예를 보고 당초대로 계획을 확정했다. 기본계획 확정 후 청주시장으로 발령되어 3년 후 행정부지사에 부임하니, 토지매입은 안 되고 토지전매로 가격이 3배 이상 높아져 토지매입에 관계직원들과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그리고 의암 손병희선생 생가 및 주변정비사업, 충주 중원 문화 사적공원(국보 제6호 중앙탑 주변)마을 이전 및 정화사업, 충청북도와 중국 흥룡강성 자매결연, 그 외 여러 사업들이 기억된다.



●청주시에서

나는 정부 임명직 3년과 선거직 4년 합해서 7년을 청주시장으로 일했다. 나는 선조 대대로 청주에서 살아왔고, 청주에서 태어나서 자란 청주인이다.

나는 내 선조들을 생각하고, 시민을 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했다. 그래서 우리고장의 역사와 문화의 보전과 전승을 생각했고, 시민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리고 세계화시대에 세계인들이 찾는 지구촌의 이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역사의 보전과 전승을 위해 망선루(望仙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10호)복원과 철당간(鐵幢竿: 국보 제 41호)주변정비, 상당산성(사적212호) 사적공원화 사업, 백제유물전시관건립, 이율곡선생이 제정한 서원향약 기념비와 지방자치헌장비의 건립, 의암 손병희선생 유허지 정비, 단재 신채호선생 사당 진입로 정비사업을 했다.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해 청주예술의 전당 건립, 시립예술단의 상임화와 무용단 창설, 전국어린이 합창대회 전국최초 제정 시행, 어린이회관 시설 확충으로 제1전시관 중축, 제2·제3 전시관을 신축하고 대량의 귀중품을 기증받아 전시했다. 김동섭박사로부터 희귀광물원석, 어패류, 동물박제, 나비박제, 세계 각국의 탈 등 3000여점을 기증받았고, 김오곤 충북노인회장은 200여점의 수석 귀중품을. 남기석 선생은 유럽 여러 나라의 역사문물 수십 점을, 나일성 연세대 천문우주학 교수는 천문 우주과학 자료 수십 점을을 기증했다. 이런 귀중한 소장품을 기증하고 많은 도움을 주신 네 분에게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시립도서관 제1호인 정보도서관 건립비를 특별지원해주신 김대중 대통령, 예술의 전당 건립비와 동물원 건립비를 지원해 준 김덕영 도지사와 한국 제1호 국제테니스장을 조성하여 시에 기부한 유남수회장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문화 창조의 새로운 도전으로 추진한 청주 국제 인쇄출판 박람회, 국제문화도시 청주포럼, 도시와 문화에 관한 청주 선언, 「직지」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유네스코 직지상 제정,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제정 2회 개최, 한국공예관 건립, 문화산업진흥재단 설립과 문화산업단지 조성 등 청주를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정성을 쏟았다.

지역개발과 시민의 생활복지를 위한 사업으로 시 외곽 순환도로 총 28.7km 건설 (동부 10.9km, 북부 6.3km, 서부 4.1km, 남부 7.4km) ‘고속버스 및 시외버스 터미널 이전, 3차 우회도로 착공, 쓰레기 매립장 및 소각장 건설, 재래시장 정비, 택지개발 5개 지구, 하수처리장 증설, 그 외에 너무 많은 사업을 추진하느라 공무원들이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게 전 직원이 고생한 결과 ‘새천년맞이 지속가능한 도시평가’에서 청주시가 전국 1위 수상과 사업비 예산 100억 원의 시상금을 받았다.

국제관련 사업으로서는 청주국제항공엑스포 개최(2회 시행, 퇴임 후 중단), 종합무역센터 설립과 해외시장 개척, 국제도시와의 우호 친선 교류사업으로 중국의 상해, 북경, 연길, 심양, 무석, 석가장시, 그리고 중국 서부 중심도시인 무한시(武漢市)와 자매결연을 했고, 유럽지역은 유네스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마인츠,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일본의 후쿠오카, 가나자와, 돗도리, 키타큐슈, 미국의 라스베가스, 러시아의 공업도시인 로스토푸시, 브리아티아 공화국 포다포부 대통령을 초청 청주를 방문하여 바이칼 호수와 관련한 관광개발을 협의하다가 임기가 끝나 퇴임하게 되었다.

공직 퇴임 후에는 (사)미래도시연구원의 설립 운영, (사)주민참여도시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사)세계직지문화협회 회장을 하고 있다. 세계평화운동단체(UPF)대표로 개성을 방문(2011년), 북한 아태재단을 통해 북한 동포에 밀가루 300t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제 나의 족적을 회고하면서, 추진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가슴속에 남아 있는 사업으로 초정리에 세종교육문화특구 조성사업, 해외동포 청소년 교육관 건립, 아시아 항공우주 교육기지 건설, 문화산업단지내 문화기술학교 설립, 독립기념관 명칭-광복기념관으로 개정, DMZ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과 세계평화 생태공원 조성, 한국 전통 건축문화단지 조성 등, 이들 사업이 앞으로 조속히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염원한다.

나는 나의 조부님과 선친이 가르치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올바르게 실천하지 못했지만, 공의(公義)와 정도(正道)로 살고자 노력을 했다.





나 기 정



○ 충청북도 청주시 내수읍 우산리 출생(1937)

○ 학 력

- 청주중학교, 청주고등학교 졸업

-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졸업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 경 력

- 신인등용 선발시험 합격(61년) 공직생활시작

- 내무부(지방행정국, 기획관리실, 지방재정국, 지방개발국, 감사실)

- 충청북도 공무원교육원장, 진천군수, 영동군수

-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 강원도 동해출장소장, 태백시장

- 충청북도 기획관리실장, 행정부지사

- 청주시장 임명직(21대), 민선(24대)



<공직퇴임후>

- 충북대학교에서 都市行政 강의 (2004년 - 2006년)

- 한국정보기술응용학회 회장

- (사)미래도시연구원 설립(원장)

-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자문위원

- (사)주민참여도시 연구원 이사장

- (사)세계직지문화협회 회장(현)



○ 상 훈

- 녹조근정훈장(산업증산 生)

- 홍조근정훈장(지방문화)

- 황조근정훈장(지방행정유공)

- 명예경제학박사(충북대학교)

- 지속가능한 도시 전국종합평가 1위 (대통령상)



○ 저 서

- 지방재정 자금운영제도 개선

- 지방재정구조에 관한 연구

- 지방으로부터의 외침

- 지방행정인의 꿈

- 세계문화도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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