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문학평론가)

 

(동양일보) 제노사이드(대량학살) 연구는 대상에서 가해자를 빼고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주제로 다루 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국가나 그 주변 권력의 개입으로 진행된 사례가 대 부분이므로 연구자들의 접근 자체가 수월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대령학살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아울러 사회과학적 접근이 필요하지만 접근에는 용기가 수반될 필요성 이 뒤 따른다. 더구나 그것이 살아 있는 권력과 보이지 않게 연계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러 하다.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은 모든 유대인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유대인과의 혼인을 법으로 금 지했다. 유대인은 모든 권리 박탈과 동시에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 군 점령지역에서는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이 대량학살 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러나 아직도 나치의 추종자들이 종종 보고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1999년 7월부터 중국 내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감옥이 나 노동교양소 수감자들을‘장기이식’사업의 주요 공급원으로 이용한다는 보고가 있다. 국 가의 누군가가 이를 허용하고 있다면 이 학살은 무엇인가라는 폭발적 질문이 터져 나오게 된다. 르완다의 야마타라는 지역에서는 농경민족인 후투족과 유목민인 투치족의 민족적인 갈등 으로 불과 며칠 만에 100만 명 이상의 투치족이 학살을 당하였다.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들 이 후투족 과격파와 손잡은 종교인들에 의해 성당 안에서 집단 학살당하였다. 르완다 제노 사이드 현장인 성당 내부에는 당시 처참하게 죽어간 르완다 양민의 유골과 옷가지 등이 그 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국에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가 서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는 곳곳에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다. “민간인 학살”이 가져온 결과다. 우리나라 여러 대통령들은“불행한 전쟁에 참 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우리 국민이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 “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사과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국가 지도자들은 경제문제의 타계를 위해 진상파악을 유보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19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즈군을 격퇴시키는 과정에서 2백만 명의 캄보디아인을 희생시킨 자신들이 역사적 과오를 통해 한국군이 과오를 바라보고 있는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본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제노사이드』는 작가가 비판적 지성인답게 한일 과 거사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그릇된 사고에 메스를 들이대는 용기를 보여준다.
일본의 독자 들은 대부분‘관동대지진이나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일본인의 대량학살에 대한 후회나 반성보다는 저자의 역사관이 불만이다. 제노사이드에 대한 연구는 정치 군사적 필요에 의해 개인들이 집단학살에 참여하여 끔찍 한 살상을 저지르고도 후회하지 않게 되는 야만적인 군중심리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서부 터 시작된다. 그리고 어째서 인간은 서로 죽이며 살아가는가의 명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살 상 이전에 잔혹한 고문 등을 자행하여 얻은 정보로 살상 후에는 희생자들이 살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세공하여 야만적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 시킨다. 아울러 잔혹 한 행위자들은 희생자들을 청산되어야할 대상이라는 확신을 외부와 내부로부터 주입받고 어린이와 임산부조차 구별하지 않는 집단살상을 저지르는 야만적 심리로 충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그들은 집단 살상을 저지르고도 후회하지 않는 군중심리에 갇히게 된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집단학살을 구조적으로 자행한 경험에 익숙해져 있다. 어찌하면 이제노사이드를 막을 수 있을까. 그 답은 혹여 폭력자의 가슴에 살고 있을까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