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을 맞아 다시 보는 유네스코 기록유산죽리 김이교가 1811년에 쓴 양국 왕래, 사신단 활동상 기록한 귀중한 유물

김이교가 당시에 소지하고 갔던 '통신사 인장'
김이교가 쓴 신미통신일록
김이교 초상

(동양일보 유환권 기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에 이어 독도침탈 야욕 등에서 보여주는 일본의 야만성은 우리에게 늘 ‘불쾌지수'를 높여준다.

그런 이유로 해방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지내던 일본이었지만 결국엔 수교를 맺고 양국관계를 정상화 시켰다. ‘외교’라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한국이 일본과 을사늑약에 의한 강제 합병이 아닌, 대등한 관계에서 현대적 의미로 수교한 날이 바로 1965년 6월 22일, 53년전 오늘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을 맞는 오늘 그 일을 새삼 다시 조명하는 이유는 양국간 선린우호관계 차원의 공식 외교 왕래를 기록한 중요한 근세 유물이 충남 공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리 김이교가 쓴 충남 유형문화재 222호 ‘신미통신일록’.

공주시 옥룡동 소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충남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은 김이교가 1811년 신미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작성한 외교일지다.

근세 한일관계를 들여다 볼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서로서 작년 10월 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천, 지, 인 3권으로 구성된 신미통신일록은 김이교가 부사 이면구와 함께 1811년 2월 12일 통신사의 사명을 띠고 순조에게 사폐(辭陛)의 예를 올린 후 한양을 출발하는 여정을 기본으로 시작한다.

이 안에는 경상감사와 동래부사 등 대일외교 일선을 담당하는 지방관의 보고 내용은 물론 예조와 비변사에서 그것에 대해 논의하고 처리한 내용 등이 수록돼 있다.

또한 왜선의 도래, 일본 외교관의 출입, 담당 역관(통역사)의 차출과 접대, 일본에서 가져온 외교문서의 기록과 보존, 외교사절끼리 주고받은 물품과 내용,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청과 규정, 그리고 심지어 통신사 일행이 현지에서 받은 향응기록 등 매우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사명을 다한 통신사 일행은 같은해 6월 27일 다시 뱃길에 올라 7월 3일 부산에 도착했고, 한양에는 7월 26일에 귀환했다. 험난한 통신사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정사 김이교는 공로를 인정받아 종2품 가선대부 품계를 하사 받는다.

이 책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과거 두 나라의 선린 우호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라는 점과 당시 일본이 조선에 대해 ‘구애’에 이를 정도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 측은 이미 1805년(순조5년) 부터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기 위해 사신이 문서와 진상품을 가지고 왔을 정도였다. 특히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1786년 취임할 당시 일본 측은 막부의 재정위기 상태로 국력이 미천해 사신을 청하지 못하고, 취임한지 20여년 만에 통신사를 요청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파격적이었다.

또한 과거 일본은 통신사 접대를 위해 엄청난 지방재정을 투입했는데 사절단을 한번 맞이하기 위해 일본 측이 부담한 재화가 당시 일본 궁내부의 1년 예산에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울러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확립한 에도 막부 체제 속에서 일본은 외교에 있어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통신사를 통한 조선과의 외교시도는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같은 이유 등으로 학계에서는 신미통신일록의 완역과 함께 연구가 제대로 마쳐질 경우 중요 내용을 채록하고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내용을 토대로 조선 근세사 및 당시의 외교 정책 등을 자세히 파악할수 있을것으로 보고 있다. 충남도와 공주시는 앞으로 이 서적의 번역사업, 학술행사, 특별전 등 후속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공주에 있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현재 신미통신일록을 비롯해 죽리 김이교의 초상과 통신정사 인장 등 다양한 관련 유물을 일괄 보관 전시하고 있다. 공주 유환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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