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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치비화(25) 일제, 살 주고 뼈 취하다… 언론통제 완화로 성난 민심 달래
조선통치비화(25) 일제, 살 주고 뼈 취하다… 언론통제 완화로 성난 민심 달래
  • 박장미
  • 승인 2018.07.01 1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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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판 신문의 허가

▷미즈노: “이 자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데, 바로 동아·조선일보와 같은 조선어 신문에 대한 허용 과정입니다.

당시 조선어신문을 허용한 것에 대해 각계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데라우치 백작 같은 분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조선인의 기분을 알기 위해서는 단지 총독부의 기관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에 의견이 일치했고, 조선 사람들 사이에 어떤 공기가 흐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다소 반대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치안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라면 오히려 이를 인정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어신문을 허용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조선어신문 중에는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가끔 싣는 적도 있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조선인의 의향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이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정보 발달시대에 언제까지나 조선인들에게만 신문 발행을 금지시키는 것은 주위의 눈을 생각하더라도 도저히 그대로 밀고 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선어 신문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총독부가 조선어 신문을 허용한 것에 대해 조선인들은 새로운 정책 중의 하나라며 기뻐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불을 지피는데 굴뚝이 없으면 언젠가 가마가 파열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굴뚝이 있어서 연기가 굴뚝으로 잘 배출되면, 그 파열을 막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금번 총독부가 조선어 신문을 허용했던 것은 바로 굴뚝을 만들어준 것과 같은 격이고, 조선의 긴장된 공기를 완화하는데 아주 좋은 분출구를 마련해 준 것으로 이런 점에서 새로운 정치를 높이 찬양해야 한다고 말했던 적도 있습니다.

물론 조선어 신문의 허용은 이익과 해독이 공존하는 일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언론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현재의 사상의 조류에 편승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어 신문을 허용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젊은 관리와 젊은 조선인들이 흉금을 터놓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분명 조선인의 사상을 완화하는데 유효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내가 임기를 마치고 조선을 떠나온 후에 이들 젊은 조선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1919년 당신들이 총독부에 있었을 때만큼 유쾌하게 느꼈던 적도 없었습니다. 당시는 우리들이 너무나 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만, 그 때는 총독부 관리들과 격의 없이 의논도 했고, 때로는 서로 격분하여 토론도 할 수 있었지요. 물론 의견이 다른 적도 있었지만, 서로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상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후 당신들이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자, 총독부 관리들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고, 때문에 왠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답니다. 다시 그 때와 같은 분들이 와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쾌한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 동료들 사이에 항상 거론되고 있는 화제랍니다. 서로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면, 설령 의견이 다르다 해도 의사가 소통하게 되니까 전체적으로 원활히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감개무량 합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의 젊은 관리들은 상당히 연구 노력을 거듭한 자들이었고, 조선인 젊은이들(그 중에는 배일 조선인도 있었음)을 상대로 하여 술도 같이 마시고, 토론도 해가면서 종국에는 그들을 설복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언론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은 조선 청소년들이 매우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바였고, 이 점에 대해서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공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은 일본 정부의 언론에 대한 억압을 비난했고, 일본 정부가 얼마나 조선인을 억압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예를 들 때 가장 먼저 언론억압을 들었으며, 당시 미국의 평론계에서는 이에 대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비난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새로운 정책으로서 언론 억압을 완화했고, 신진 기예 선비들의 모임인 동아일보를 허용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조선인 탄압에 대한 중외의 비평을 일소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후부터는 미국인들도 우리정부의 언론 억압에 대한 공격은 완전히 침묵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언론결사의 취체

▷지바 “언론의 자유를 일정 범위 내에서 인정했다는 것을 지금 말씀하신 내용으로 보아 대강 짐작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덧붙여 집회의 자유까지도 상당히 인정하게 되었는데, 그 경과에 대해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점 두세 가지를 덧붙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과거 총독 정치는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는 물론, 집회의 자유에 대해서도 매우 엄중한 취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익히 알고 부임했습니다. 특히 우리들이 부임할 당시에는 독립소요에 자극을 받아 집회라는 것이 거의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부임 후 얼마 안 있어, 경마회를 열려고 한다며 상담하러 온 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경마와 같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집회를 가져도 지장이 있는지 없는지 잘 알지 못해 걱정 끝에 저에게 물으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기생 연예회를 극장에서 개최하고 싶은데, 이것이 허용된 사실인지 아닌지를 몰라 타협하러 온 자도 있었습니다. 그 만큼 조선인들은 집회라는 것을 거북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취체는 취체, 집회의 자유는 자유라는 식으로 좀 더 밝은 분위기에서 조선인을 인도해갈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경마도 연예회도 집회를 가져도 모두 지장이 없으니 염려 말라고 분명히 말해 준 후, 그로부터 점차 집회의 자유를 상당한 수준까지 인정하는 쪽으로 일을 추진해 갔습니다. 이와 동시 언론의 자유에 자극 받아 정치적 결사, 종교적 결사, 민간인 각종 단체가 주최하는 여러 집회가 활기차게 개최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 두 세 가지 사건에 대해 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20년 7월이 되어 도쿄에 체재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들이 언론의 자유에 자극을 받아 새 정치에 대한 비판하는 연설회를 조선 내에서 개최할 기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약 10명 정도가 선발부대로 먼저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 통치에 대해 비판을 가함으로써 암암리에 독립 사상을 선동하려 했는데, 취체 경찰 측에서는 이를 비교적 관대히 처리해 주었습니다.

이들은 그 기세를 몰고 경성 각지에까지 방종한 말들을 퍼뜨리기 위해 드디어 경성으로 잠입해 들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은 물론 민간 유력자들까지도 이와 같이 방종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간과해 두면 앞으로 조선을 통치하는데 매우 큰 장애를 가져올 것이라고 염려했기 때문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7월 18일 경성에서 모임을 갖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학생 주동자를 경찰에 출두하라고 명령했고, 언론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자유를 보장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대신 변사들 스스로 언론에 대해서는 그에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주지시키고 미리 그들을 납득 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일 단성사라는 극장에서 연설회가 열렸는데 과격한 언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종로 경찰서 소속 경관 수 십 명을 파견하여 해산을 명했습니다. 그 후 조선 내에서의 그들의 집회를 절대로 금지한다는 뜻을 전달하게 되었는데, 이 일격에 의해 그들의 방종한 언론은 일소 되었습니다.

그 외 간도지방의 독립을 기도한다는 취지 하에 열린 대일본 고사연구회는 1920년 4월 20일에 해산을 명령했고, 또 암암리에 독립을 선동한다는 조선인단은 1920년 7월 30일에 해산을 명함과 동시에 소속 변사 6명을 기소했습니다.

요컨대 집회의 자유는 상당히 완화되었고,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도 상당히 완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관대함을 베푸는 것이 조선통치상 필요하다는 것은 당시 치안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자들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고, 느꼈던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소위 정치 결사 및 종교 결사의 자유에 대해 어떠한 취급을 해왔었던가에 대해서는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당시의 경무국장을 맡으셨던 아카이케시로부터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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