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 석 우 시인

송호성은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한 후 보정군관학교를 거쳐 중국 군벌의 기병사단장을 지낸다. 1942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을 지내면서 임시정부의 일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는 특이하게도 해방이 되자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한에 와서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그 후 조선경비대 제2대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1947년 영광스럽게도 육군 최초의 장성인 준장이 된다. 광복군, 족청, 대동청년단, 장총단, 학병단, 학도대, 대한무관학교 등 30여 개에 달하는 군벌 성격의 군사 조직이 난립해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에 국가를 위한 그의 책임은 실로 막중한 것이었다. 그 후 제4대 육사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정부수립 후 1948년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체성이 모호한 일면을 보이며 무능함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해 여수·순천 10.19사건이 났을 때 토벌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진압작전에 나섰으나 반란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당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하여 육군 총사령관직에 더 머물지 못하고 만다. 1949년 3월 호국군 사령관으로 나앉더니 1950년 6월 10일 예비군 조직인 청년방위대의 고문단장으로 밀려버리고 말았다.

그는 중국대륙에서 독립군, 중국군, 광복군으로 투쟁한 경력을 가졌을 뿐, 현대 병력을 통솔할 자질이 부족할 뿐 아니라 사상적인 문제로 뒤로 내몰리고 있는 중에 한국전쟁을 맞게 된다. 헌병사령관 장흠은 송호성에게 “정부를 따라 남하하자”고 권유하였다.“그놈들이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가고 말았는데 나는 뒴박이 아니다. 이범석에게 채이고 채병덕에게 채이고 내가 갈 곳이 어데냐? 나 혼자 여기에 남겠다. 당신 혼자서 가시오.”송호성은 단호하였다.

1950년 7월 4일 송호성의 목소리가 북한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인민군대가 인민의 이익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군대라는 것과 인민정권은 조선인민을 위한 정권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총부리를 돌려 인민의 원쑤 미제와 매국노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라“고 울부짖었다.

송호성은 육군 준장으로 국방경비대 사령관으로 있을 때. 육사 3기 입교 환영식에 연사로 초빙되어 “조선 국방경비대는 좌도 좋소, 우도 좋소.”라며 “누구든지 우익으로 자본주의 사상을 따를 수 있고 좌익으로 공산주의 이념도 가질 수 있으며 사상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경비대에서는 사상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대우될 것이다.”라고 거침없이 말을 토해낸 적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형편에 따라 국가관을 뒤집는 형편없는 장군이었다.

육사 3기는 여순 반란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등 60명이, 육사 6기는 1949년 임관자의 10%가 남로당의 지령으로 암약하는 것을 겨우 숙청하고, 1948년 12월 30일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을 검거하고, 1949년 4월 1일 남로당 중앙간부인 이중업을 검거하여 남로당 추종자들을 제거했다고 안도하던 이승만 정권은 송호성의 월북으로 큰 상처를 안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송호성은 월북하지 않았으면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승만은 통제력을 상실하고 레컴프랙스에 감염되고 말았다.

송호성은 1953년 인민군해방전사여단 단장과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상무위원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어찌된 일인지 반혁명분자로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1959년에 사망한다. 사회주의 정권의 창시자 레닌은 거짓말도 100번을 들으면 참말이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부정당하는 무언가를 계속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