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꿈을 꾸지 않기도 하는지, 생각해보면 언제부터인가 자고 일어나 생각나는 꿈이 없었다. 기억을 못한다면 꿈나라도 무소식이 희소식인건가 싶은데 종강을 하고는 자다가 엉엉 우는 일이 일어났다.

방학이라고 몸도 마음도 이완되어 꿈도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붙잡혀 갇혀있다고 잠결에 하더라니 학기 중의 긴장을 이렇게 풀어내는 것일지. 얼마나 긴장을 했다고 해마다 학기마다 해온 일을 두고, 새삼. 꿈도 잠도 원대로 되지 않음을 날로 체득하게 되는가보다.

지난 겨울에는 갑자기 밤잠이 줄었다. 노인이 되면 잠이 준다고 해서 잠 많은 체질이니 나이들수록 공부하기 좋겠다고 기대를 걸기도 했는데 막상 밤잠이 줄어들자 그게 그렇게 만만하게 책을 잡게 되지 않았다. 밤잠은 줄었는데 낮잠이 늘어났다.

이상한 건 밤이 되면 잠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애먼 전화기만 손에 들고 그 속으로 연결되는 가상의 세계들에 눈길을 놓아두었다. 그렇더라도 밤은 오히려 짧게 지나갔다. 백내장이 시작된 건 그 때의 청광 때문인지도 모른다.

의식은 자주 무기력의 안개에 포위된 듯 어디에고 정성이 생겨나지 않았다. 무엇이거나 누구이거나 내 노력이 필요해지는 정황이 생겨나면 도망치고 싶었다. 마음의 골짜기마다 울리며 늘어나는 메아리처럼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 일이 잦아졌따. 병원을 좀 가보면 어떻겠냐고 진지한 조언을 들었다. 그래, 이런 건 성찰도 뭣도 아니지 싶어 병원을 찾았더니 약을 몇 알 처방해 주었다. 드디어 마침내 나도 마음의 감기라는 것에 걸렸는가 싶었는데 집에 돌아오면서 처연해졌다.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니 원인 제공자가 떠올랐던 것이다.

아니 사람보다는 정황이 떠오르고 그 원인에 멀미가 났다고 해야할지, 더는 그 정황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막막함에 나이를 세고 있었다. 이렇게 늙어가는 것인지 싶어진 것이다. 딸이라거나 며느리라거나 가족이라거나 제사라거나 명절이라거나 시집이라거나 친정이라거나 효도라거나 신앙의 양심이라거나 하는 관계와 가치가 요구하는 것들이 묵직하게 마음을 공격해왔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나 비판의식이라면 그게 주는 에너지라도 있는 법일텐데 그저 찔리는 게 할 일인 것처럼 오래된 그 문화적 논리들의 공격에 마음이 너덜거렸다. 공격으로 공경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방어를 잘하도록 치밀함을 장착하지 못한 채 함정같은 관계들에 뛰어들다가 널브러지는 일은 나이 들수록 무참하다.
봄은 여름은 꽃이 넘쳐나고 초록이 넘실대도 푸른 잎 같을 안녕은 안녕하시기 어렵다. 집 밖의 관계들은 건강하고 안전한가, 꼭 그렇지 않을 것이나 역할 경계가 비교적 명료하다. 집 안의 역할은 잘 해내야 하리라는 당위 앞에 중단없이 전진하라는 근대화의 구호처럼 고단하다.

젊어서는 신체적 지구력 없음을 한탄했더니 나이 들면서는 마음의 지구력이 약함을 절실히 인정해야 하는 모양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출중하신 목사님은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이 나이면 몸과 마음이 소진되는 거라고 관계들도 중간 중간 쉬어서 가야 한다고, 젊지 않다고, 그걸 인정하라고 나의 자아발견을 촉구하신다.
애들은 늦게 자라고 이미 늙고 다시 늙는 부모의 늙으심을 앞둔 처지에 늙을 새가 없다. 비가 오면 뿌드득거리는 몸을 데리고 뭔가를 억울해 하며 태풍 오는 계절을 나다보면 과장해서 생각하게 된다. 대체 언제 마음 놓고 늙어갈 수나 있을까 몰라.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