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해석을 통해 본 삶과 죽음의 의미

 

안유경(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국철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사람들은 삶이란 어머니의 몸속에서 태어나는 순간에 시작해서 죽으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사라져 버릴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죽음을 외면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또한 종교와 신앙에 매달려 죽은 이후 좋은 곳에 가거나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탄생 속에는 이미 죽음이 있기에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죽음은 삶 속에서 삶의 한 부분으로 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명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이성적으로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리기가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가? 이와 관련하여 중국 남송시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熹, 1130-1200)의 해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자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기에 앞서, 사후 세계에 대한 장자의 글을 소개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사후 세계는 과연 두려움의 세계일까?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사후 세계를 여희(麗姬)라는 인물을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여희는 애()라는 곳의 국경을 지키는 사람의 딸이었네. 처음 진()나라에 잡혀갔을 때는 너무 슬프게 울어서 눈물로 옷깃이 흠뻑 젖었지. 왕의 궁전에 이르러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자 처음 울고불고한 것을 후회하였다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죽은 사람들도 살아있을 때 살기를 바랐던 것을 지금 후회하고나 있지 않는지를 내 어찌 알겠는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며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인들은 삶과 죽음을 기의 취산(聚散)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은 도가를 포함한 동양인의 보편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주자도 다르지 않다. “기가 모이면 살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거나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는 단지 나올 뿐인데, 기가 다 나와 버리면 죽는다.” 음양의 이기(二氣)가 모여서 응축하면 삶이 되고 이기가 흩어져 분산되면 죽음이 된다. 때문에 사람은 기의 응취와 더불어 삶을 시작하고, 기의 분산과 더불어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기의 취산으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죽은 후에는 태허(太虛) 또는 원기(元氣)와 같은 본원의 기로 돌아간다고 설명한다. 밤낮이 바뀌고 사계절이 변화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도 형태가 바뀌는 것일 뿐 그 본질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사생일여(死生一如)의 관점이다. 이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본원(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죽음을 낙관하게 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은 노자도 다르지 않다. 노자는 죽음을 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도의 유행인 것이다. ‘의 관점에서 보면 나고 죽는 것은 서로 다른 별개의 일이 아니다. 하나의 도(생명)가 현상계로 나오면 바로 사는 것이요 본체계로 들어가면 바로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도 도의 유행이요, 죽음도 도의 유행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자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주자는 사생일여의 관점을 공자나 노자처럼 도가 아닌 리(또는 天理)로써 설명한다. 주자는 삶과 죽음을 기의 취산으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의 취산을 작용하게 하는 근원으로서의 리를 동시에 상정한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리의 입장에서 보면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자는 기는 없어져도 리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로써 무릇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기이다. 리와 같은 것은 다만 기에 머무를 뿐이니, 애초부터 응결하여 저절로 어떤 사물이 되는 것이 아니니 리는 모이거나 흩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에는 모이고 흩어지는 작용이 있으므로 또한 모여서 어떤 사물이 되지만, 리는 모이고 흩어지는 작용이 없으므로 모여서 어떤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니 반드시 기 안에 머물면서 기의 모이고 흩어지는 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근거가 된다. 때문에 기가 있지 않을 때에도 곧 이러한 이치는 있으며, 이미 이러한 이치가 있다면 반드시 이러한 기가 있게 된다.” “만약 이러한 리가 없으면 곧 귀신도 없고 만물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주자가 말하는 기가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리’, 즉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리는 무엇인가. 이에 주자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누구나 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은 본래 물이지만 거품 또한 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거품이 없어지면 다시 원래의 물로 되돌아가듯이, 사람의 삶과 죽음도 이와 같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시적 현상인 삶이 끝나면 영원성을 띠는 본원의 리로 돌아가 영속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앞에서 말한 노자와 공자 등의 일반적인 사고와 다르지 않다. 다만 주자는 본원의 기(또는 도)에 해당하는 개념을 리로써 해석할 따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 즉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사람이 죽어보지 않고) 어떻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의 질문에 대해서도 주역계사전의 말에 근거하여 그 처음(태어난)의 이치에 근원하여 마지막(죽음)의 이치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귀신과 죽음에 관해서는 공자와 자로(子路)의 문답이 유명하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또한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는 아직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공자는 귀신과 죽음에 대한 물음을 유보한 채 현세적 삶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전한(前漢)시대의 사상가인 유향(劉向)은 공자의 귀신과 죽음에 대한 물음에 유보적 태도를 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존재합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있다고 말하려니 효자와 효손들이 자기의 삶을 망치면서까지 죽은 이를 보내는데 빠져들까 두렵고,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없다고 말하려니 불효한 자손들이 죽은 사람을 내팽개친 채 장례도 치르지 않을까 두렵구나. 네가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네가 죽은 후에 알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문답은 죽음과 귀신의 문제를 논외로 했다기보다 이들의 문제를 삶의 차원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소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죽음과 귀신의 문제를 보다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 선행조건으로 삶과 인간의 문제를 보다 세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귀신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살펴보자. “태어나는 것은 정기(精氣)가 모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많은 기를 갖고 있지만 반드시 그것이 소진될 때가 온다. 소진되면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가 죽는다. 사람이 장차 죽을 때에는 열기가 위로 상승하는데, 이것은 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하반신은 점차 차가워지는데, 이것은 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로부터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자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정기가 모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음인 과 양인 가 합쳐져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는데, 정기를 생명의 에너지로 이해하는 것은 주역계사전정기위물(精氣爲物)’에서도 보인다. 정기로써 삶과 죽음을 설명하는 것은 왕충(王充, BC 20-90)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정기 때문인데 죽으면 정기가 소멸된다. 정기가 되는 것은 혈맥 때문인데, 사람이 죽으면 혈맥이 고갈된다. 혈맥이 고갈되면 정기는 소멸되고, 정기가 소멸되면 형체는 썩고, 형체가 썩으면 재와 흙이 된다.”

주자는 이러한 정기(또는 기)를 혼과 백으로 구분하니, 맑은 기는 혼이 되고 탁한 기는 백이 된다. 그래서 사람이 죽게 되면 혼(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육신)은 땅으로 내려가 결국 썩어 없어지게 된다. 이렇듯 사람의 혼과 백은 죽음과 더불어 각기 다른 세계로 돌아간다. 더 나아가 주자는 백은 귀()가 되고 혼은 신()이 된다라고 하여, 혼백을 귀신으로도 설명한다.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곧 귀신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귀신은 서구에서 말하는 사탄이나 유령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귀신은 천지 사이의 조화이니, 단지 두 기가 굴신왕래(屈伸往來)하는 것일 뿐이다.” 귀신은 굽히고 펴고 가고 오는 이기의 작용에 불과하다. 이러한 굴신왕래하는 작용은 이치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므로 귀신은 이기의 양능(良能)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죽었을 때는 혼백이라고 하고, 살아있을 때는 정기라고 하며, 천지의 공공에서는 귀신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자는 귀신을 으로 구분하니 다만 하나의 기일 뿐인데, 오는 것은 신이고 가는 것은 귀이다. 몸에 비유하면 살아있는 것은 신이 되고 죽은 것은 귀가 되니 모두 하나의 기일 뿐이다.” 귀신 역시 하나의 기이지만, 보는 측면에 따라 귀와 신으로 구분된다. 양은 펴는 것을 주로 하니 이 되고, 음은 굽히는 것을 주로 하니 가 된다. 펴는 기에도 또한 폄과 굽힘이 있으니 펴는 것은 신의 신이고 굽히는 것은 신의 귀이며, 굽히는 기에도 또는 굽힘과 폄이 있으니 굽히는 것은 귀의 귀이고 펴는 것은 귀의 신이다. 해와 달에 상대해서 말하면, 해는 신이고 달은 귀이다. 풀과 나무가 싹터 나오는 것은 신이고, 시들어 죽는 것은 귀이다. 사람의 경우에는 어린아이에서 장년에 이르기까지는 신이고, 쇠하여 늙는 것은 귀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것은 신이 되고 죽은 것은 귀가 된다. 코로 숨을 내쉬는 것은 신이고, 들이쉬는 것은 귀이다. 다시 말하면, 혼은 신이고 양에 속하며, 백은 귀이며 음에 속한다. 그러나 두 기는 실제로 한 기의 작용에 불과하다.

이때의 는 돌아간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어디로 돌아가는가? 예기제의(祭義)편의 모든 생명은 반드시 죽으며,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을 귀라고 한다.” 따라서 돌아간다는 것은 죽어서 육신이 땅에 묻힘으로써 자연과 일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늘로 올라간 혼(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혼 역시 기이며 특히 맑은 기이니, 살아있는 동안에는 육신 속에 결합되어 있다가 죽음과 함께 우주 속으로 흩어지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혼을 신(), 펴지는 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가 흩어져 없어진다. 죽음과 함께 이미 혼백이 흩어져 없어진다면 자손들이 제사를 지낸들 어떻게 감응하여 이르겠는가?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자공의 물음에 공자의 대답처럼, “죽은 후에 영혼마저 없어진다고 하면 불효한 자손들이 죽은 사람을 내팽개친 채 장례도 치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례도 치르지 않을 것인데, 제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영혼마저 흩어져 없어진다면 결국 제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가에서 줄곧 제사를 강조해온 의미는 무엇인가. 제사는 단순히 사후세계의 존재와는 무관한 후손들의 도리()로써만 해석되는 걸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주자는 조상과 자손의 기가 조금씩 연속되고 있으며, 이렇게 연속할 수 있는 이유로써 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상의 정신과 혼백이 비록 이미 흩어졌어도 자손의 정신과 혼백이 조금은 서로 연속하기 때문에 제사의 예에서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조상의 혼백을 부를 수 있다. 이미 흩어진 뒤에서 보면 완전히 없어진 것 같지만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바로 감응이 이르는데, 이것은 리가 항상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록 조상의 기는 흩어져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 뿌리는 자손에게 연속하고 있으니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조상의 기를 다시 불러 모을 수 있다. 주자는 이것을 파도의 물결에 비유하기도 한다. 뒤에 밀려오는 파도는 이미 앞에 지나간 파도가 아니지만 하나의 물결로 이어져 있듯이, 자손의 기와 조상의 기도 흩어져 없어지지만 그 뿌리는 파도의 물결처럼 자손에게 이어진다. 때문에 제사의 예를 통하여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조상의 기를 불러 모을 수 있다. 그래서 조상의 기가 일부 자손의 몸에 있다가 제사지낼 때에 자손이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이 기가 자연스럽게 펴지는데, 이것이 바로 신()의 드러남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손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조상의 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때문에 주자는 제사라는 의식 못지않게 조상과 자손 사이를 관통하는 기의 교감을 중시한다.

이처럼 주자는 한번 흩어지면 없어져버릴 수 있는 기를 자손으로 연속시킨다. 내가 죽어도 나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삶을 통해 영속한다는 것이다. 그는 왕충처럼 태허(원기)로의 복귀를 통해서 죽음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손들을 통해서 죽음이 끝이 아님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조상의 기를 물려받은, 즉 조상의 기와 같은 기를 공유하는 자손이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자는 리가 항상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자손과의 기의 공유를 리로써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할아버지와 손자는 하나의 기이니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저절로 그렇게 서로 감응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새가 알을 낳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새가 알을 낳는 것도 생명을 지속하기 위함이요, 알을 까서 새가 되는 것도 생명을 지속하기 위함이다. 알만 보면 새가 생긴 뒤에 알은 껍질만 남겨 놓고 없어진 것 같지만, 알의 생명은 새에게로 옮아가는 것이다. 또 알을 낳고 죽은 새는 아주 죽은 것 같지만 새의 생명은 알에게로 옮아가는 것이다. 이리하여 생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또한 주자는 이것을 나무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나무는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씨앗을 맺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새로운 싹을 틔운다. 싹은 어디에서 오는가? 싹은 씨앗에서 나오고, 낙엽이 썩어 싹을 자라게 한다. 사람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조상이 되고, 그 조상이 있음으로써 자손이 있다. 따라서 죽음은 자손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의 완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주자는 풍수설을 비난하면서도 아버지의 무덤을 두 번이나 이장한 데에는 이 기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자는 삶과 죽음을 하나의 리로써 관통시켜 해석한다. 리와 하나 되면 삶을 좋아하거나 집착하지도 않고 죽음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삶과 죽음은 있을지라도 나의 존재는 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하다. 이것은 삶과 죽음을 둘로 이분화한 것이 아니라 사생일여의 관점에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본래 둘이 아니므로 따로 떼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주자는 삶의 이치를 알면 저절로 죽음의 이치를 알게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실의 일상적인 삶을 강조하며, 더구나 현실의 일상이 바로 삶의 전부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현실의 실재하는 삶을 충실히 살면 죽음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즉 삶을 잘 영위하는 것이 잘 죽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주자의 관점에서 삶을 잘 영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을 잘 영위한다는 것은 일상의 삶에서 시시각각 당면하는 직분과 역할에서 천리(天理)의 실현을 근간으로 하는 삶, 즉 천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역시 삶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리이므로, 리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도 없고 삶도 없다. 이 때문에 주자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면 저절로 죽음의 이치를 알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자는 삶과 죽음을 천명(天命)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고자 하였으니, 왜냐하면 결국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회피하려는 것은 리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리와 하나 되는 삶을 추구하고 갈망한 그의 삶은,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회피하려는 현대인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되새기게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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