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지난 달 15일 개막전을 시작으로 한 달여 숨 가쁘게 달려 온 러시아 월드컵이 오는 16일 결승전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당초 북미회담이라는 세계적 이슈에 가려 열기가 식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월드컵은 월드컵이다. 일찌감치 16강 진출이 좌절된 한국도 결과에 관계없이 월드컵의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선사했다.

FIFA 랭킹 1위인 독일을 상대로 랭킹 57위의 한국이 아시아 축구역사상 최초로 디펜딩 챔피언(직전 월드컵 우승국)을 이긴 나라가 됐다. 그것도 2:0이란 스코어로.

월드컵에서 이변도, 새로운 기록도 중요하다.

그러나 승패를 올곧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문화 역시 경기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다.

한 TV프로그램에서 차범근 전 국가대표감독과 하석주 전 국가대표선수가 20년 만에 만나 ‘눈물의 화해’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사연인즉슨, ‘왼발의 달인’이라 불리던 하석주 선수가 1998년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직후, 수비를 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백태클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을 하게 됐다. 치열한 접전 끝에 경기는 멕시코에 3:1로 패하며 끝이 났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었을까. 차범근 감독은 월드컵 대회기간 중에 ‘감독경질’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고, 하석주 선수는 자책감에 오랫동안 차범근 감독을 피하게 됐다는 것이다. 결과에만 매달려 관용에 인색한 우리사회가 그에게 씌워 준 ‘굴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20년 전, 경기 중에 받은 레드카드가 인생의 ‘레드카드’가 되어 발목을 잡는다면 누가 국가대표란 명예로운 짐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을까.

우리말에 ‘머드러기’와 ‘지스러기’란 말이 있다. 어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과일무더기나 생선 중에서 가장 굵고 실한 것을 ‘머드러기’라 하고 나머지를 ’지스러기‘라고 한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을 통해 드러난 ‘머드러기’ 1위는 단연 디펜딩 챔피언 독일이다.

80년 만에 최악의 성적을 거뒀음에도 요하임 뢰브 감독을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보다 더 전문적이고 훌륭한 축구감독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승패를 가리는 스포츠에서 ‘실수’나 ‘이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독일은 패배를 객관적 사실로서 받아들였을 뿐이다.

우리는 어땠나. 스웨덴 전을 치른 뒤 한국 팀에 쏟아지는 질책과 페널티킥 파울을 범한 김민우 선수를 향한 비난은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멕시코전에서 한국은 열심히 뛰고도 승점을 올리지 못했다. 멕시코전에서는 장현수 선수가 경기 내내 공적이 됐다.

“선수는 질책과 격려를 먹고 산다.”, 전 차범근 감독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경기에 패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범법자처럼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하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설혹 경기 중에 결정적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주홍 글씨’가 돼서는 안 된다. “축구는 스타가 아닌 팀이 하는 것이다“ 축구황제 펠레의 말이다.

그렇다. 일부 팬들의 과한 질책과 빗나간 애정표현이 있었지만 ‘머드러기‘ 2위는 우리 대한민국의 몫으로 돌리고 싶다.

독일과의 경기에서 희망을 보여준 우리 선수들에게 주는 보상이다. 손흥민 선수의 눈물과 맘고생이 누구보다 심했을 김민우, 장현수 두 선수에게 주는 위로다. 밤잠을 설쳐가며 진심으로 선수들을 응원해준 팬들에게 드리는 고마움의 표시다.

편파적일지 모르지만 ‘지스러기’ 1위는 일본이다.

폴란드전에서 지고 있는 상태에서도 10분 이상 볼을 돌리며 어부지리를 노린 소위 ‘산책축구’가 선정이유다. 아시아권에서 유일하게 16강에 올랐다는 프리미엄을 감안해도 그 바탕이 페어플레이 점수이자 월드컵 정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죄, 가중처벌 받아 마땅하다.

이번 월드컵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당당한 ‘머드러기’의 삶을 택할 것인가, 양심을 버린 ‘지스러기’의 삶을 따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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