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현대사회는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부와 금전만능의 의식이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정신보다는 물질이 중요시되는 사회로 변화되었다, ‘자식에게 물질보다는 정신을 물려주라’는 조상들의 교훈은 한낱 구두선이 되어버렸고 ‘뭐니 뭐니 해도 모니(money;돈)가 최고’라는 의식이 사회 평가기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뜻있는 사회단체나 인사들이 정신이나 윤리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려 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수천 년 간 인간의 정신적 양식 및 이성적 행동의 지침서로 삼아온 명심보감이나 논어 등은 도서관의 한 모퉁이에서 먼지에 쌓인 채 낮잠을 자고 있다. 거기다가 전자기기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문명의 노예 상태에서 기계화되고 있다. 정신이나 철학보다는 눈앞의 편리 및 실용에 철저하게 집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이 아무런 여과과정 없이 사회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사회는 본질보다는 기교 및 요령 등이 판을 치고 있다. 본질과 기교 간에 본말전도의 현상이 만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정치를 비롯하여 사회 모든 분야는 물론 일상적인 대화에도 파급되었다. 사회문화가 정(正)이 아니라 부(副)가 주류가 되는 현상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을 중시하고 기교는 가벼이 하는 중본경기(重本輕技)가 아닌 본질은 경시하고 기교나 요령이 중시되는 경본중기(輕本重技)의 사회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현상은 산업화 물결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산업화 물결 못지않게 국정철학의 빈곤 및 비일관성 등도 주요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건국의 이념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국정이나 사회가 홍익을 인간의 정신세계나 의식 등에 뿌리를 내리게 하지 못하였다. 홍익인간의 이념은 사회규범, 행동강령, 평가기준 등으로 자리 잡지 못한 채 빛바랜 구호나 슬로건으로 퇴색되었다. 국가나 사회가 온통 요령주의, 기교주의로 물결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본질보다는 포장과 궤변 등을 잣대로 삼고 있는 것이다. 본질과 거리가 먼 임기응변에 의존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은 현상이나 대상 등이 가지고 있는 핵심내용이고 존재가치이며 생명이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개념정립이나 프로그램 전개 등은 필히 본질의 시각에서 접근 및 진행되어야 한다. 본질과 상반되거나 무관한 기교나 요령 등으로 포장하거나 장식하는 것은 금물이다. 모름지기 국가나 사회는 본질의 시각에서 개념이 정립되고 그 개념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본질이 생명처럼 존중되고 모든 판단과 행태의 잣대가 되는 사회가 되게 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중본경기의 문화가 형성되고 착근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런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에서 올바른 국정철학을 정립하여야 하고 강력한 실천 및 실행 의지가 필요하다. 정부의 선민후관 의식의 착근, 공무원들의 민본적 공복관과 행정실제에서의 빈틈없는 국민 및 주민 중심적 행정의 실천 등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의 모든 것은 본래 국민의 것이기에 ‘주민을 위한 행정’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정부가 국민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하는 것인 양 공공행정을 국민에 대한 시혜적 산물로 호도하는 촌극의 연출 속에 국민의 복지증대라는 행정의 본질이 도외시 된 것이다. 정부기관은 이 밀려난 본질을 찾아 생명처럼 소중히 지키고 구현하여야 한다. 행정은 민본을, 국회는 법의 준수를, 사법은 법의 권위수호 등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 행정, 입법 및 사법 우위적 사고나 관존민비의 타성에서 과감히 탈피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정부기관에만 기대서는 아니 된다. 국민의 성숙된 의식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하고 주인의 자리에 맞는 판단과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들은 공직자들이 청직성(淸直性)을 가지고 공무에 임하고 있는지와, 현장에서 선민후관(先民後官)의 공직관이 접목되고 있는지와, 행정이 본질을 경시 내지 배척하고 기교나 요령 등으로 각색하고 있지는 않는지 등을 철저하게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대국민 사업이나 행보 등을 바로 보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본질 중심적 의식 및 자세를 체질화 시켜야 한다. 공공의 일에 기교나 요령주의 등이 전혀 통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본질이 중시되고 기교나 요령 등은 단지 본질의 장식용으로서의 가치만 갖게 하여야 한다. 본질만이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타당하고 진리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중본경기의 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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