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 희 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일이다. 모래시계라는 TV드라마가 회사원들의 퇴근 후의 발걸음을 집으로 재촉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가 종영된 후 청소년들이 미래의 꿈으로 ‘깡패’라는 이상한 직업(?)을 수위로 놓았다 하여 어른들이 혀를 찬 일이 있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은 의사, 변호사를 거쳐 연예인, 건물주 등으로 변해 왔다. 며칠 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요즘은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이 유투버(YouTuber), 비제이(BJ: Broadcast Jockey), 크리에이터(Creator),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스트리머(Streamer) 즉, 인터넷 개인방송운영자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와 그 해결점을 향한 길이 찾기 어려운 미로(迷路)인 이유는 인생의 본질적 의미가 절대적인 추상적 가치까지도 형식적 개념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미래 희망은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직업의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형식적 이름이 아닌 철학적 가치관만이 이들의 미래 희망의 의미를 측량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의사라는 직업이 가수라는 직업보다 더 위대한 것이라면 엘튼 존(Elton John)은 그가 아무리 노벨상을 탔다고 하더라도 나치(Nazi)의 생체실험을 이끈 칼 브란트(Karl Brandt)보다 어쨌든 볼품없는 존재여야 한다. 꿈이 ‘유투버’라는 요즘 아이들이나, 그렇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이나 도대체 본질이 없는 뜬 구름만을 논하는 상태에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인생을 잘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이제 ‘돈’으로 온전히 수렴되어 있는 듯하다. 돈이 권력까지도 가져다 줄 수 있고 건강까지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에 대부분의 국민이 동의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 우리나라에서 모든 성공의 잣대를 이제 ‘돈’이외의 것이 갈음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 굴곡 없는 행복한 삶은 ‘돈’이 가져다준다는 주장은 적어도 ‘행복’이란 추상적 개념이 ‘돈’이라는 물질에 종속되어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성립한다. 또한 ‘행복’한 상태는 권력과 건강에 연동되어 있다는 주장도 적어도 ‘행복’이란 개념이 편안한 ‘육체’에 종속되어있다는 원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성립한다. 그런데 만일 이 주장이 일말의 진정성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인류와 국가의 위대한 인물로부터 예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이순신, 김구 등을 우리는 제외해야 한다.

성공의 본질은 ‘돈’과 ‘육체’적 평안 같은 물질적 성격으로부터 떨어져서 물리적 속성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즉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는, 그래서 인격적 감각으로만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철학적 영역 안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 추상적 개념을 깨닫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이다. 이 본질적 교육개념을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위태로운 인격의 낭떠러지기에 서있는 것이다. 이 본질을 되찾는 것이 교육개혁이다. 작금(昨今)의 교육개혁에 관한 논쟁이 오직 형식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오류를 현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입시제도 개편이 어렵다 못해 어떠한 방법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허상인 이유는 제도의 형식성이 이룰 수 없는 난제(難題)이기 때문이 아니다. 도대체 그 형식적 교육개혁과 물리적 입시제도의 개혁이 어떻게 ‘월세를 또박 또박 받을 수 있는 건물주’나 유치원생도 조회수만 늘릴 수 있으면 떼돈을 버는 ‘유투버’가 꿈인 아이들을 양성해 내지 않을 수가 있는가? 어른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산해 내는 여하한의 입시제도 개혁안과 교육개혁안은 현재로써는 이러한 형식화된 꿈을 인생의 목표로 도치(倒置)한 괴기스러운 계층의 형성을 돕고 있다.

성공한 유투버로 평가받는 사람들이 어떤 내용을 유투브에 올리고 무엇을 유지하여 큰돈을 벌고 있는지 지금 당장 인터넷을 켜 보라. 그런 활동을 통해서 버는 그 ‘돈’들이 적어도 우리의 자라나는 아이들이 갖는 존재가치와 삶의 이상(理想)과 또한 그들에게 명성(名聲)을 가져다주는 방법이 될 수 있어야 하겠는가? 이제 국민의 혈세로 유지하는 방송매체들의 황금시간대까지도 음식을 먹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가고 있다. 영혼의 가치까지 물질보다 하위에 있음을 전제하며 교육개혁의 본질을 형식화하는 이 시대를 우리는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는가? 돈 몇 푼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분노하는 이 시대에 교육의 순수한 가치를 위해서 일말의 분노라도 펼쳐 보일 지식은 종래 찾을 수 없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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