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관리인 로베르토와 청소 마친 대원들의 기념 촬영. 독일 이민 2세인 로베르토의.철두철미한 직업 의식이 캠프를 맑고 향기롭게 가꿔줬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낙엽 지는 계절이 따로 없는 쿠바, 풀숲에는 망고며 야자나무 잎사귀가 어지러이 굴러다닌다. 브리가다 캠프의 낙엽이며 쓰레기 줍는 일은 조경 책임자인 로베르토 몫이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울 땐 입소자들을 불러 모아 팀을 짠 뒤 구역을 나누고 빗자루를 쥐어준다. 젊은이 몇몇을 골라 뽑아 빛바랜 페인트를 새로 칠하라고 시키기도 한다. 보름 동안이지만 먹고 자는 곳을 스스로 깨끗하게 가꾼다는 뿌듯함 때문에 보람 또한 크다. 나무 위 새들도 빗자루 든 나를 따라다니며 청소할 곳을 알려준다. 까마귀 닮은 새가 내는 소리 ‘아끼, 아끼’ 는 스페인어로 여기란 뜻이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가면 기다렸다는 듯 ‘씨, 씨’ 라고 또 다른 새가 소릴 내서 여기가 맞는다며 화답해 준다. 스페인어 강사보다 발음이 또렷한 새소리, 야자나무 스쳐가는 바람 소리 벗 삼아 즐겁게 땀 흘려가며 빗자루를 휘두른다. 두 시간 남짓 비질하는 동안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벙긋 미소 지은 로베르토가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모아둔 쓰레기를 리어카에 담아 소각장으로 옮기고, 페인트 붓 씻은 물은 통에 모아 다음번 재활용을 위해 갈무리한다. 그는 일을 마무리 지은 대원들을 불러 모아 기념 촬영하자고 말한다. 폰을 쳐다보는 대원들 얼굴에 그득한 미소는 노동의 가치를 훨씬 돋보이게 하는 오브제다.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더위며 피로를 삭일 무렵 어딘가 다녀온 로베르토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나를 부른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달려가 보니 난생 처음 보는 열매를 내게 건네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대원들 모두의 시선이 내 손에 쥐어진 열매에 붙박이 된다.  

로베르토에게 얻은 건 지리모야란 과일이다. 과육은 시루떡처럼 잘 부스러져서 나눠 먹기에 그저 그만이다. 대원들이 지리모야에 몰입한 걸 틈 타 주머니를 뒤지는 로베르토. 뭘 꺼내는 걸까 살펴보니 주민등록증이다. 거기엔 말끔한 차림의 사진과 함께 양친의 출신 국가도 인쇄되어 있다. 그걸 떳떳이 내미는 걸 보니 혈통이 남다르다는 걸 자랑하려는 게 틀림없다. 느낌대로 아버지는 독일 국적, 엄마는 아일랜드다. 혼혈이 일상이 된 나라에서도 은연중에 핏줄을 내세우는 로베르토. 그가 언제부터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 캠프에서 일하게 된 건지는 알 필요 없다. 눈빛만 보더라도 일의 종류나 성격 따지지 않고 노동에다 몸을 오롯이 던질 게 뻔하니까.  

브리가다 캠프에 두 번 째 참가하면서 가장 먼저 로베르토가 보고 싶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직원들에게 그의 안부를 묻고 캠프를 돌아다니며 찾기 시작했다. 지난 번 추억이 뇌리에 짙게 새겨져 잊히지 않은 탓이다. 돌아본 캠프는 저번과 달리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풀숲엔 휴지며 낙엽이 어지럽게 굴러다녀서 손질한지 오래 된 느낌마저 든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한참 동안 찾았더니 로베르토는 농기구 보관창고 부근에 맥없이 앉아 있다. 지난번과 달라진 거라곤 청소하는 대원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뿐인데.  

로베르토에게 다가간 나는 알아보겠느냐며 서툰 스페인어를 건넨다. 그는 쓸쓸함이 깃든 눈동자를 천천히 굴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를 도와 누구보다 열심히 비질이며 페인트칠 했으니 모를 턱이 없다. 곁에 나란히 앉아 백팩을 열고 준비해 온 물건을 꺼낸다. 손에는 맥가이버 칼과 예쁘게 포장된 볼펜이 딸려 나온다. 두 가지를 그의 손바닥에 얹으며 레갈로,라고 말한 순간 절반이 잘려나간 왼쪽 엄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악한 산업현장에서 자주 봐 왔던 일들이 동영상처럼 스쳐가고, 천원 벌려고 절단기로 철판 자르다가 손가락 잃은 노동자가 떠오른다. 그럴 때 마주 쥔 손의 수세미 질감이나 손등 주름 따윈 뒷전이다. 고맙다며 고갤 숙이는 그의 눈가가 젖어 드는 걸 보면서 흘려보낸 짧은 순간은 요양원에 병문안 온 기분마저 든다.

캠프 참가비가 저번과 달리 꽤 비싸졌다 싶었던 건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대원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대신 관리인이 그 일을 도맡으란 지시가 내려졌나 보다. 빈둥빈둥 놀면서도 청소하는 대원이 보이지 않은 것에다 로베르토가 풀 죽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던 까닭을 알게 됐다. 로베르토에게 맡겨진 일이 많아졌다는 걸 안 뒤부터 일과가 끝나기 바쁘게 두리번거리곤 했지만 그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대원들 스스로 하던 일을 혼자 떠맡았으니 쉴 틈이 없는 탓이다.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요긴한 물건을 건네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캐리어를 뒤엎어 쓸모없어진 게 있는지 살폈다. 풍등에 글씨 쓰려고 가져온 매직이며 떨어진 걸 서로 붙이는 데 효과 만점인 강력테이프를 찾아냈다. 캠프 전체의 영선업무를 도맡았지만 물자가 부족한 탓에 뭔가 고장이 나도 제때 수리하지 못했을 그에겐 더없이 소중한 물건이 틀림없다.

그보다 로베르토의 아버지는 어쩌다가 쿠바로 건너와 결혼해서 그를 쿠바노로 살아가도록 했을까. 부강한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면 손가락이 잘리는 불운을 겪을 턱이 없었을 텐데.작업도구를 건네며 애틋한 마음으로 잡아 본 그의 엄지가 유난스레 차갑게 느껴졌다. 잘려 나간 엄지에도 체온이 제대로 전해지라고 두 손을 꼭 움켜쥐고서 말했다. ‘당신은 캠프의 쁘레시덴떼야.’ 그는 대통령이란 말에 표정이 환해지며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건 쿠바를 아끼는 마음과는 또 다른 아쉬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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