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찬바람이 그치지 않고 볼과 귀를 가져가는 혹한의 땅 연해주(블라디보스톡)는 시베리아의 동남단에 위치해 있는 나라 잃은 우리민족의 아픔을 다독이여 주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 바람의 땅, 연해주에는 4만여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우리의 옛 영토였던 고구려와 발해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120 Km 쯤 떨어진 우스리스크에는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서 있고, 그 가까운 곳에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고택이 있다.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각종 훈련과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안 의사는 우리민족의 수탈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대한 응징을 결연히 단행하게 된다.



크라스키노는 연해주의 최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젊은이들이 1909년 이곳에서 약지 손가락을 자르며 비밀결사 조직인 단지회를 만들었다. 열두 사람이 각각 왼편 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 앞면에 혈서로 글자 넉 자를 크게 쓰니 대한독립이었다. 쓰기를 마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부른다. 그리고 안중근과 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를,김기룡 등은 이완용, 박제순, 송병준 등을 암살하기로 하고 3년 내 이들을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로써 국민에게 속죄하겠다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

당시 이들이 태극기에 쓴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는 1914년 8월 23일 권업신문에 게재된다. 약지 마지막 손마디가 잘려나간 안중근의 손도장은 당대 조선인의 가슴에 독립의 열망을 불타오르게 했을 뿐 아니라 후대의 한국인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의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2011년 8월 4일 크라스키노에 안중근, 김기룡, 엄인섭, 백규삼, 황병길 등 12명의 이름이 아로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조국과 민족을 위한 피 끓는 젊은이들의 맹약은 보는 이의 가슴에 민족을 위한 삶이 무엇인가를 돌이켜 보게 만든다.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안 의사가 1909년 이토를 저격한 플랫폼 옆의 귀빈용 대합실 일부를 쪼개서 만든 100여㎡의 작은 공간이다. 입구의 외 벽면에는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오전 9시30분'를 가리키고 있는 고정된 대형 벽시계가 걸렸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안 의사의 흉상과 동양평화론에 대한 전시문이 눈을 이끈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구상은 특정국가의 이익을 벗어나 지역경제공동체와 블록경제론, 공동방어론을 주장한 것이었다.'는 해석을 달아 놓고 있는데 이는 유럽 연합(EU), 유럽 공동체 (EC), 유로(EURO) 등의 선사상에 해당한다할 것이다. 그리고 양쪽 벽에는 일제 침략기의 상황과 안 의사 의거 '하얼빈에서의 11일 행적'을 그리고 설명하고 있다. 의병 투쟁과 단지동맹, 최후의 유언 등 업적을 사진과 사료를 중국어와 한국어로 병기하여 전시하고 있다. 저격 현장 위에 '안 의사 이토 히로부미 격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글귀가 걸려있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아버지 안태 훈과 어머니 배천 조 씨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흑점이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응칠이라 불렀다. 안중근은 프랑스인 신부에게 불어를 배우며 새로운 학문을 익혔다. 그는 계몽운동가로 교육운동을 벌이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안중근은 의병부대 참석하여 참모중장의 임무를 맡아 맹약하던 중, 포로를 석방하는 바람에 일본군에게 위치가 노출되어 곤경을 치러야만 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군악대 연주를 들으며 안중근은 플랫폼으로 나와 러시아 군인들 뒤로 보이는 백발의 이토를 향해 방이쇠를 당겼다. 이토가 쓰러지자 안중근은“대한독립 만세' 를 외치고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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