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저술가, 별난 우체국장에서… 이제는 ‘솟대명인’ 우뚝
솟대에 옻칠 입혀 독보적 작품 제작에 성공… ‘조병묵 솟대’로 불려
“여러 직업 가졌지만 목공예술이 최고… 광화문에 솟대 세우고파”

조병묵 '솟대명인'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동안 만든 솟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예로부터 하늘을 향해 세우는 장대와 돌기둥은 인간세상의 염원과 의지의 표상이었다.

나무나 돌기둥을 세운 끝에 새를 앉히면 솟대가 된다.

높다란 장대 끝에 앉은 새는 땅과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지켜야하는 소명을 하늘에 알리고, 하늘의 뜻을 땅과 마을로 전하고자 하는 소통의 상징이다.

솟대는 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소망의 몸짓으로 하늘에 이어가려는 간절함의 통로다.

때로는 기원하고, 때로는 그리움을 날려 보낸다.

그리하여 끝내는 하늘의 신명을 받아 가없이 연약한 인간 세상에 위안을 준다.

이 같이 출현한 솟대는 한반도는 물론, 만주-몽골-시베리아 등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신앙대상물로, 누천년을 이어 왔다.

재앙이 있는 곳에 신앙이 뿌리내리듯, 뱃길이나 먼 길 떠나는 이들을 위해 남아 있는 이들은 염원을 모아 징표를 만들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신령 모시는 곳마다 장승과 솟대를 세웠다.

그러나 이제는 점차 사라지는 옛 풍속물인 솟대-

그런데, 요즘 들어 한국의 곳곳에서 솟대가 다시 세워지고 있다. 손재주의 부활이 아니라 솟대의 의미를 살려내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한사람이 솟대명인 조병묵(77)씨.

하찮은 나무라 할지라도 그의 눈과 손에 들면 오롯이 솟대로 생명을 얻는다.

그 솟대에 옻칠을 하고나면 비로소 태어나는 ‘조병묵 솟대’, ‘작품으로의 솟대’가 되어 목공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석화리111-1. 조 명인의 작업장이다. 국도와 철로가 지나는 뒤편 양지바른 곳에 비닐하우스도 같고 가건물도 같은 건물 앞마당에 들어서면 오른 쪽으로 나무더미가 쌓여있다. 비닐로 잘 덮어 빗물과 햇볕이 들어가지 않도록 여며놓은 낙엽송통나무더미가 바로 솟대로 부활할 원목이다. 300평 대지에 50평짜리 작업실 겸 전시실, 그리고 10평짜리 옻칠작업장으로 구분되지만, 작업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느티나무며 소나무, 물푸레나무가 수북하다. 그 중 목공예를 하는 이들이 결이 곱고 색깔이 깨끗해 제일재목으로 꼽는다는 쪽동백나무도 언젠가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저 원목들만 보고 있으면 배가 부르다”는 솟대명인은 솟대에 관련한 소회와 소망에 대한 설파說破로 영상 35도의 폭염쯤 아랑곳이 없다.

-그 동안 신문을 통해 몇 권의 저서를 출간하셨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계속 저술활동을 하실 줄 알았는데 목공예에, 특히 솟대제작에 진력하고 계시다는 또 다른 소문에 참 욕심도 많으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팔순八旬이 내일인데 솟대가 인생의 후반기를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요.

“저는 어떤 일이건 하고 싶은 일은 꼭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중·고교 교사로도 27년을 지나왔고, 집안사정으로 시골 별정 우체국장으로도 10년을 근무했었습니다. 한때는 대학과 정보통신부공무원교육원 강사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고 젊은이들에게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1991년) ‘아버지가 들려주는 삶 이야기’를 펴냈습니다. 첫 저서著書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공적인 진로선택’과 ‘내 인생을 바꾼 아버지의 한마디’, ‘아이의 인생을 바꾸는 인성교육’을 연이어 발간했습니다. 헤아려보면 5,6년에 한 권씩을 펴낸 셈입니다.”

-출판비는 건지셨나요?

“처음 만든 ‘아버지가 들려주는 삶 이야기’가 5만부 쯤 팔렸다니 원고료는 건졌지요.”

-‘내 인생을 바꾼 아버지의 한마디’는 공저共著여서 자세히 보니 조동환 교수(국립 진주산업대경영학과)가 아드님이시더군요.

“그렇습니다. 부자간에 만든 책이어서 쑥스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첫 저서인 “아버지가 들려주는-”의 연장선상에서 가정교육을 통한 삶의 철학을 다룬 책입니다. 내용 중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주체성이 있어야하고>, <공동체 의식을 지녀야하며>, <평생교육을 위한 능력과 의욕을 지닐 것> 등을 간략하지만 강한 톤으로 답을 주었지요. 마무리쯤에는 훌륭한 가문의 좌우명과 가훈 등을 제시한 것은 물론 100년 전부터 자녀들을 유학 보내 사회의 인재로 키워낸 한양 조씨 집성촌인 경북 영양의 주실 마을 등을 예로 들었지요.”

-가정과 자녀 교육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으로 일관하시다가 어떻게 목공예에, 그리고 솟대 제작에 빠져들게 되셨는지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다면…

“교직에 있을 때, 우리나라 목불상의 대가로 꼽히는 공주의 오해균(85) 명장을 찾아뵈면서 목공예의 심오함에 빠질 즈음 공주박물관에서 처음 솟대를 보았어요. 그런데 그 솟대를 보는 순간 ‘이것이다’라는 찰나의 느낌이 왔습니다. 52세 때였습니다. 지금부터 25년 전이지요. 그 후 다시 가서 스케치도 하고 솟대의 의미며 유래며 지역별 국가별 모양 등을 수집했지요. 땅과 하늘의 통로인 솟대야말로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과 현대가 맞닿아 있는 겨레의 핏줄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내 여생을 솟대에 걸어보겠다는 결의를 품게 됐지요.”

작업장을 지나 방 하나에 들어서니 갖가지 형태의 솟대가 가득하다.

각종 목재로 만들어진 크고 작은 솟대를 자세히 보면 어느 것도 같은 것이 없고, 소홀한 것이 없다. 온갖 세월과 풍상이 빚어낸 나무뿌리의 받침대들도 제 각각의 별난 모양이지만, 이에 장대를 뽑아 올려 새를 앉힌 솟대의 형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자연과 인위의 절묘한 형상을 연출한다. 어디서 어떻게 구해졌는지는 모르나 얽히고설킨 나무뿌리들의 형태부터가 범상치 않다.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고 톱질하고 끊임없는 사포질을 거쳐 여인의 결 고운 속살처럼 다듬어지면 최종작업인 옻칠로 마무리가 된다. 그리고, 그리고 비로소 어엿한 ‘솟대’로 이름을 얻는다.

-원목에서 솟대로 변신되기까지 몇 번이나 손질이 가는지요.

“솟대 가능성이 보이는 원목을 잡으면 건축사가 설계를 하듯 상상력을 동원하여 형상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자르고 사포질의 반복으로 살결을 만듭니다. 최소 100회 이상의 손질을 가해야 되는데 최종은 옻칠입니다. 옻칠은 가장 어려운 작업이자 마무리 공정입니다.”

-사포와 옻칠의 전쟁이겠군요.

“목공예품의 매끈한 살결은 사포질로 결정이 납니다. 그러나 나의 솟대는 옻칠로 단장되어야 끝납니다. 옻칠솟대지요.”

-‘옻칠 솟대’라는 말은 좀 생소한 듯 한데요.

“그럴 것입니다. 전국의 솟대장인들 중 솟대에 옻을 입히는 작업은 나 혼자 뿐입니다. 말하자면 옻칠을 한 솟대라면 그건 ‘조병묵의 솟대’라는 말이 됩니다.”

-작업시간은 대략 언제쯤인지요.

“누가 들으면 미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만,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가 작업시간입니다. 자르고 깎고 다듬고 문지르고를 반복하는 쉴 사이 없는 작업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의 향기로운 냄새와 함께하는 시간이어서 즐겁고 기쁘게 일 합니다.”

-만들면 다 작품이 되는가요?

“천만에요. 10개 중 1개는 부수고 다시 만들게 돼요. 어떤 것은 10번을 새로 만들어서 겨우 완성한 것도 있어요. 남들이 보면 몰라도 내가 보면 솟대의 기본과 어긋나는 것이 보여요. 형태는 비슷한데 솟대의 생명력이 부여되지 못한 것은 장난감에 불과하지요. 살아 있는 솟대만이 소통의 구실을 하는 ‘작품’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제작된 솟대는 몇 점이나 되는지요.

“25년간 만든 솟대는 3000점 정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작품으로의 솟대를 고른다면 500여 점쯤 되겠지요.”

-요즘엔 어떤 솟대를 주로 제작하시는가요.

“옛날 우리들이 시골에서 흔히 보던 등잔 모양에다 솟대를 연결해 보니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돼요. ‘등잔솟대’라 이름 붙여 보았는데 의외로 주문도 많고 정감 있어 해요. 특히 나이든 분들은 시골에서 어머니가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거나 정한수를 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면서 향수에 젖기도 해요. 200개를 제작, 10만원 씩 판매했는데 160여 점이 팔렸어요. 선물용으로도 꽤 주문이 들어오기도 하고요. 역시 우리는 우리고유의 정서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나 봐요.”

- 옛 충북 청원군 강외우체국장 10년 하시는 동안에도 ‘별난 우체국장’으로 소문이 났었지요?

“마을에 도서관이 없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어떤 분이 300여권의 책을 기증하셨어요. 이를 계기로 국장실을 개조해 ‘열린문고’라 이름 하여 아예 도서관을 만들었지요. 소문을 듣고 주민들이나 충청체신청 등에서 책을 보내 왔어요. 하루에 2,30명 정도가 책을 빌려가는 일이 이어지면서 도서관 역할을 톡톡하게 했지요. 서가에 꽂힌 책 중 대부분은 내 개인이 소장하던 1500권 이었지요.”

-교직과 별정우체국장, 그리고 이젠 솟대 명인으로 살아가시는 생애를 돌아보시면서 어느 때가 가장 보람이 있으셨는지요.

“지금처럼 솟대를 만드는 목공예가로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이 기쁘고 뿌듯해요. 크게 돈은 되지 않지만 교육자가 제자를 길러 내놓듯, 자칫 버려질 수 있는 나무뿌리부터 옹이박이 까지를 소중하게 다뤄 작품으로 내놓는 작업은 남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희열이 있어요. 솟대제작 25년간 여러 수준 있는 전시회에 초대 돼 출품도 했고, 좋은 상도 탔으며 이제는 ‘솟대명인’이라는 영예도 얻었으니 더 욕심을 낼 것이 없습니다.”

-현재 조 명인의 솟대가 세워져 있는 곳은…

“대통령 별장이던 청남대 초가정草家亭에 10점을 비롯, 청주시 오송읍 호수가 공원에 28점이 세워져 있지요. 근래엔 청주 상수도본부와 충주 지현동 ‘사과나무 이야기길’에도 세워졌지요. 그리고 2004년부터는 청주 그랜드호텔(청원구 율량동)1층 로비에 솟대상설 전시장이 있어요.”

-그래도 작가로서의 꿈이 있다면…

“솟대작가로 마지막 꿈이라면, 서울 광화문 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나 세종대왕 동상 옆에 ‘조병묵 솟대’가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어요. 물론 이뤄지기는 어렵겠지만, 솟대가 예로부터 마을 수호신의 상징이거나 과거 급제한 이의 마을 어귀나 다음 해의 풍년을 비는 뜻으로 세워졌기에 그런 위인의 동상 옆에 세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옻칠이 된 ‘조병묵 솟대’가 아니어도 현대조각가의 작품으로라도 솟대가 한국의 대표적 명소에 자리 잡는다면, 우리 고유문화의 전승과 국민염원을 함께 담는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솟대가 마을도 잘 지키지만 가정도 잘 지켜달라는 기원도 담겨 있을 것인데, 가정의 평안은 온전하신지요.(웃음)

“ 아내(한영이·72)는 청주교대를 나와 잠시 교직에 몸담았었고, 장남(조동환·48.경남과학기술대 경영과 교수)과 차남(조성환· 43·로펌 충정 변호사), 장녀(조옥길·46·뉴욕 거주)가 모두 건강하게 자기 일들을 잘하고 있어요. 미국 미시건대를 다니는 외손자 놈이 ‘할아버지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말을 해준 것이 늘 가슴에 기쁨으로 남아 있어요. 요즘엔 우리 부부가 시낭송에 관심을 갖고 연습을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그러나 솟대를 만들 듯 열정을 쏟으면 조병묵 스타일의 시낭송이 되어 듣는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지요”

-솟대로는 보는 감동을 주셨으니 시낭송을 통해 듣는 감동까지 주시길 바랍니다.



■ 동양일보 회장·시인



■ 조병묵曺秉默 목공예가는…

*1942년 충북 음성군 대소면 태생리 출생. 호는 송산松山

*청주고·건국대 경제과·청주대행정대학원 교육행정과 졸.

*1969년부터 청주중·운호고·음성고 등에서 27년간 중·고교 교사.

*1996년 충북 청원군 강내면 강외우체국장(별정우체국)10년.

*2002년 14회 청원문화제 7회 향토사랑 작품전 출품.

*2006년 벤쿠버 전시회 초대.

*2007년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 지역작가 초대전.

*2009년 8회 한국옻칠공예대전 특선.  14회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 특선.

*2011년 서울 인사동 솟대전시회.

*2012, 2013년 청주 우민아트홀과 청주 현대박화점 갤러리서솟대전.

*2015년 대한민국 솟대명인(대한민국명인회) 충청북도 공예명인.

저서

*‘아버지가 들려주는 삶 이야기’(1991)

*‘성공적인 진로선택’(1997)

*‘내 인생을 바꾼 아버지의 한마디’(2010)

*‘아이의 인생을 바꾸는 인성교육’(2015)

*이메일 : cbm913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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