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정부가 주관한 캠프에서 친구가 된 라틴 아메리카 출신 대원들. 제각각의 작은 이슈를 내세워 지지를 얻어내려는 목적으로 모였다.

(동양일보 김득진 기자) 부족한 걸 견뎌내야 혁명을 이해하게 된다는 듯 쿠바 정부가 주관한 캠프에는 갖춰진 게 별로 없었다. 세면장이며 화장실은 물이 모자란 탓에 이름값도 못했다. 세숫비누 한 장, 두루마리 휴지 한 개로 보름 버텨내는 일이 혁명의 지름길이라거나 어려움이 닥쳐야 같은 민족끼리 똘똘 뭉쳐진다는 걸 오랜 내핍 생활을 이어가며 깨우쳤던 걸까. 덕분에 나도 라틴 아메리카 출신인 것처럼 페루인 히랄도와 가까워졌다. 소개가 끝나기 바쁘게 뛸 듯이 다가와 친한 척 한 그는 야마 장식 달린 열쇠고리를 억지로 쥐어주며 눈망울이 촉촉해지기도 했다. 일행이 있다는 걸 아는 데도 아기 돌보는 엄마처럼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촌티 나는 히랄도의 지나친 친절이 부담스러워 거리를 두었더니 스토커로 돌변해서 여기저길 뒤졌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을 땐 하이네켄 병 속을 빤히 들여다보거나 스푼으로 에스프레소를 휘젓기도 했다.

수렵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몽골족이 빙하기를 맞은 건 2만 5천 년 전이다. 초식동물 이동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주하던 그들 중 일부는 에스키모족이 되고 나머지는 안데스 산맥까지 도달해서 잉카 문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침공 때는 2800미터 높이 마추픽추로 피신한 뒤 돌산을 깎아 공중 도시를 건설했다. 도둑질, 거짓말, 게으름을 3대 범죄로 규정하고 완전 자급자족 생활을 하던 그들은 조상이 과연 누굴까 의문에 휩싸였고, 생긴 건 아시아인 비슷한데 견줘볼 만한 상대가 없었다. 잉카 문명에 버금갈 만큼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킨 곳을 찾다보니 일본이 물망에 올랐다. 그 무렵 정치단체에서 활약하는 페루 리마 태생 일본인 2세 후지모리가 그들 눈에 띄었다. 곧이어 그는 신자유주의를 외치며 출사표를 던진 작가 바르가스 요사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었다. 호화판 선거운동을 펼치던 바르가스 요사와 달리 후지모리는 트랙터와 트럭을 몰고 다니며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외환위기에 시달리던 페루 국민들은 후지모리를 대통령 자리에 앉히면 일본 재정 지원이 뒤따를 걸 기대했고, 한 핏줄일 거란 믿음이 더해져 그에게 표를 던졌다. 믿었던 것과 달리 일본으로 자본을 빼돌리고 두 번 연임한 뒤에도 영구 집권을 위해 야당 의원을 매수한 거나 원주민 인디오를 살해한 것까지 밝혀져 탄핵됐다. 그 뒤 일본으로 도주한 그는 칠레에 몰래 입국한 뒤 발각되어 페루 경찰이 잡아다 구속시켰다. 25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 하던 그는 최근 들어 정계에서 이름 떨치던 자녀들이 힘 쓴 덕분에 가까스로 사면되었다.

중남미 수출길 트는 데는 FTA 체결이 지름길이다. 그 중 칠레는 구리 채굴량이 많아서 반도체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던 우리가 목을 매달아야 할 처지였다. 칠레와 FTA를 체결하자마자 칠레산 포도며 와인이 컨테이너에 실려 오고 뒤이어 구리 광석도 수입되었다. 얼마 안 가 그들은 컨테이너 가득 채운 와인이 자국의 구리로 만든 핸드폰 한 개랑 맞바꿔진다는 사실에 땅을 쳤고, 중남미 국가에 들를 때마다 한국과 FTA를 맺으면 망한다고 소문을 냈다. 무역으로 엄청난 손해를 본 그들이지만 해양쓰레기 취급하던 홍어를 우리가 수입해 준 덕분에 해묵은 감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칠레인에겐 골치 아픈 쓰레기로 천대받은 홍어가 우리에겐 귀한 먹거리가 되어 밥상 한가운데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메스티조가 많은 여타 남미 국가와 달리 페루는 우리와 동일한 DNA를 가진 한민족이다. 최근 들어 유전공학이 급속도로 발전되었고, 페루 정부에서 잉카 제국 건설했던 조상 유골을 아시아 각 나라와 견주어봤다. 결과, 한국인 DNA가 그들과 일치한다는 게 밝혀졌다. 유전자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페루인의 오랜 궁금증을 풀어준 것이다. 게다가 페루인 만이 순수 혈통을 이어왔다는 게 혈액형 검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검사 결과 그들 모두 O형이었기 때문이다.

2만5000년 전 헤어진 핏줄을 이어줄 목적으로 쿠바 정부가 개최한 브리가다 캠프. 에콰도르, 칠레며 볼리비아나 파라과이, 에스키모도 우리와 DNA가 거의 일치한다. 히랄도랑 만난 걸 기회로 매듭 문자 키푸가 문자를 대신하던 페루에 스페인어 대신 한글을 보급하고, 한 때 우리를 똘똘 뭉치도록 해 준 새마을 운동을 중남미며 에스키모에 퍼뜨리면 어떨까. 줄기차게 성장을 이어가던 국내경제가 몇 가지 품목을 뺀다면 서서히 식어가는 느낌이다. 대북 제재 탓에 개성공단이 재가동조차 못해서 그토록 부르짖던 통일로부터 한참 물러난 듯하다. 반전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라도 한반도로부터 시야를 넓혀 대영제국 못지않은 민족 공동체를 형성할 때가 된 것 같다.

쿠바 정부가 마련해 준 캠프 생활을 두 번이나 하면서 유독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히랄도 생각에 빠져든다. 불가사의에 가까워 외계인의 지구 기지라고 알려진 잉카 문명의 후예인 그가 나랑 한 핏줄이란 사실을 안 뒤 자존심조차 버리고 맥주병 속을 뚫어질 듯 살피거나 커피 잔까지 휘저었던 까닭이 뒤늦게 이해된다. 사냥감 쫓는 푸마를 닮은 성역 와이나픽추며 신의 손으로 빚었다는 공중도시 마추픽추. 흩어진 민족이 하나로 뭉쳐질 날을 손꼽으며 콘도르처럼 날개 펼친 골짜기를 거닐다가 지구 반대편을 그윽하게 바라볼 히랄도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