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사람마다 느끼는 수치심의 크기는 사뭇 다르다. 저마다의 도덕적 기준과 염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좌절과 슬픔은 그래서인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다. 살아가며 수치심을 느끼는 일을 누구나가 겪게 된다. 그러나 기억이 그러하듯 망각도 삶의 방식이다. 잊으려 도리질 칠수록 수치심이 끓어올라 삶의 나날들은 온통 버거워진다. 그것을 털어내야 숨을 쉴 수 있다. 망각의 외면도 삶의 방식이다. 다만 무엇을 얼마나 외면할지 골라내는 일이 쉽지 않다. 고교 동창으로부터 받은 돈이 ‘드루킹’과 연관된 자금이었다는 걸 뒤늦게 안 노회찬은 유서에서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라고 자책하며 불법을 시인했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라며 자신이 느꼈던 도덕적 수치심에 책임을 진다며 생을 내려놓았다. 자살을 옹호하거나, 법 테두리 밖의 정치자금 수수를 변호하자는 게 아니다. 그의 절박했던 심연을 관조하자는 것이다. 스스로의 모든 죽음은 애절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빈곤과 함께 진보 정치인들에게 강요되는 것은 도덕적 결벽성이다. 자기검열이다. 진보 정치의 도덕적 우월성은 스스로를 옥죄는 사슬이 되었다. 개인의 일탈이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혀 진보진영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크게 흔드는 결과를 노회찬은 걱정했을 것이다. 믿었던 진보 정치인마저 불법적 돈을 받았다는 ‘현상’만이 범람하고 정의당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크게 우려했을 것이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린다”라는 유서의 마지막 문장이 그랬다. 그래도 그는 반듯한 사람이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면 정치집단의 이합집산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처음 당을 만들었을 때의 역사적 소명감이나 명분으로 결기했던 순간들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 순간들을 기억한다면 탈당과 입당을 되풀이하는 명분 없는 방식의 헤어짐과 선언적 ‘선당후사’의 용어들이 범람하는 작금의 정치판과 노회찬의 처세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떠난 후 우리의 이 무더운 여름은 혼란스럽다. 삶의 의미를 지키려고 도모하는 모든 일이 오히려 삶을 망가뜨리는 기막힌 일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양심의 가책을 넘어 스스로에게 그토록 모질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자기가 속한 정당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 그의 선택이 처연하다. 분노와 비판을 하되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서려있지 않았다. 사회의 진보와 소외된 서민에 대한 진정성과 따뜻한 애정이 깔려 있던 그였다. 적어도 사회단체에서 국회에서 20여 년 가까이 그를 곁에서 바라본 나의 느낌은 그랬다. 세인들의 평과 달리 내가 아는 그는 말수가 적었다. 붉고 뜨거운 마음이 입 밖에 나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많았다. 노회찬은 거대 기득권과 홀로 싸웠다. 우리는 그에게 싸움을 위탁한 채, 무임승차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선택을 원망한다. “낡은 것은 죽었는데 새로운 것은 당도하지 않은” 상실의 시대를 살면서 먹고살기 바빴던 우린, 진보 정치인, 아니 ‘제대로 된 정치인’ 노회찬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와의 이별 후 내 마음속 슬픔을 만져본다. 거칠고 차가운 흉터투성이다. 흉터를 남긴 것은 자괴감이다. 부끄러움이다. 어차피 죽은 사람 이야기도 산자들에게 한 시간 소일거리이다. 슬픔이 휩쓸고 간 자리에 또다시 냉소가 남을 것이다. 이별이 곰삭으면 무감각이 된다. 무감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고립의 언어다. 낡은 세상을 향해 침묵할 뿐이다. 우린 그래왔다.

“저항이란, 투쟁을 타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지금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일본 역사학자 도미야마 이치로의 일갈은 노회찬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이다. 정희진의 말처럼 “삶이란 죽은 자의 망막에 맺힌 나의 시간이다”. 인생은 짧다. 정치는 시끄럽고 일상은 편안하다는 방관의 태도를 버려야 세상이 변화된다.


그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애도는 슬픔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수많은 '노회찬'들로 이 나라의 국회가 변혁되어야 한다. 우리의 이런 깨달음이 그를 보내는 최소한의 예의이다. 견딜 수 없노라 했던 ‘부끄러움’의 무게.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으로 기억될 그의 마지막 당부. 그의 발걸음은 멈추었지만, 그의 길은 끝나지 않아야 한다.


서민의 벗, 노회찬, 많이 미안합니다. 부디 잘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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