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향(서강대 철학과 학생)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나는 10살에 아빠를 잃었다. 화목한 가족의 막둥이 딸로 태어나 누구보다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여러 가지 말 못할 사정 때문에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됐고, 동시에 아빠 또한 돌아가셨다. 건장하셨던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아빠의 부고를 아빠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것이었다. 1년간 어머니와 잠시 헤어지고 오로지 아빠와 서로 의지하며 살았는데, 아빠마저 돌아가시자 나는 그 충격과 슬픔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때 내게 죽음을 대하는 법, 심지어 우는 방법조차 가르쳐 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가족을 잃은 충격과 슬픔을 함께 해줄 사람도 없었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가끔 드라마를 보면 어려서 가족을 잃은 아이에게 사랑하는 가족은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별이 되어 지켜주고 계신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꼭 옆에 있곤 했다. 10살의 나에게도 이런 말을 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나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때 나의 곁에는 외할머니와 외삼촌들만이 계셨는데 그 어른들은 아빠의 죽음을 다소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돌이켜보면 아빠의 죽음이 나에게 가장 힘들게 느껴졌던 것은 아빠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 이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내팽개쳐 버려진 느낌을 온몸으로 받았다. 가끔 어른들이 말하는 혼자 살다가 혼자 가는 세상. 그 세상에 나에게 지푸라기 한 자락도 안 남겨준 채 떠나간 아빠의 죽음에서 나는 죽음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감정은 곧 돌아가신 아빠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게 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 나는 아빠의 죽음을 영영 떠나보내지 못했고, 그 후 어머니와 재회하고 십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 가족에게 아빠의 죽음은 커다란 상처이자 분노의 감정으로 남게 됐다. 나는 어머니의 앞에서 아직도 ‘아빠’, ‘죽음’이라는 단어를 자유롭게 꺼내지 못한다. 나이를 한 살씩 먹으면서 아빠의 얼굴도 희미해져 어떻게 생기셨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지만 아빠라는 사람보다는 죽음이라는 감정이 먼저 떠올라서 그만 멈출 때도 많았다. 제삿날이 오면 아빠에 대한 미움은 더욱 커졌다. 죽은 사람에게는 나쁜 말도, 생각도 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어린 내가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제삿날이 정말 싫었다. 이런 나를 더 아프게 했던 것은 아빠를 잃은 나보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엄마를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서로 미안하고 슬퍼서 무언의 합의라도 본 듯이 ‘아빠’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렇듯 나에게 아빠의 죽음이란 두려움이자 미움, 피하고만 싶은 감정일 뿐이었다.

25살이 된 지금까지도 죽음은 나에게 여전히 하나의 떨쳐낼 수 없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두려움은 아빠의 죽음에 대한 미움이나 분노가 아니라 나만의 죽음에 대한 태도,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로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큰 계기는 ‘세월호 참사’였다. 누구에게나 그러했겠지만 뉴스에서 접한 그 죽음들은 나에게는 마치 아빠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과 같이 아팠고, 나는 자식을 잃은 모든 부모를 통해 아빠를 잃은 수많은 나를 보았다. 아직도 세월호 참사 당시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뉴스에서 보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아픈 이유는 바로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더욱 아빠의 죽음을 원망 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하루 혹은 한 시간이라도 미리 아빠의 죽음을 알게 됐다면 어떤 말, 어떤 표정으로 아빠를 보내야 할까, 그렇다면 제대로 된 이별이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됐다.

나의 어머니는 제주도에 사시는데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보니 매번 방학마다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공황장애나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늘 불안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래서 서울로 다시 올라올 때마다 어머니가 공항에 나와 바래다주시려고 하지만 매번 거절한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아빠의 뒷모습이 상상되는 자신이 싫어서 외롭기는 하지만 늘 혼자 공항으로 향했다. 뿐만 아니라 아주 가끔씩은 전화통화를 하다가 어머니와 다투곤 하는데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나는 아주 끈질기게 화해를 할 때까지 전화를 건다. 어머니는 나에게 인내심이 없다고 하지만 혹시라도 이 한 통의 전화가 어머니와의 마지막 전화라면 그로 인해 평생 자책하며 살아갈 나에게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항상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살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 덕분에 밝다는 얘기도 듣곤 한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갈등이 있을 때 이상하게도 나는 한 시간 이상을 못 넘기고 먼저 사과를 한다. 뒤끝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 또한 이별을 대처하는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항상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남아주는 것. 나의 이런 방식은 가끔은 피곤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후회가 남거나 스스로 괴로웠던 적은 없다. 그래서 자주 보는 친구라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보는 사이처럼 한 번 더 웃어주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제 5회 청년포럼’에서 ‘죽음’에 대하여 대화를 한 것이었다. 참가자 분들 모두가 침착하게 죽음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처음에 죽음에 대해서 나의 경험을 얘기하자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떻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는지 혼자 머릿속에서 정리하느라 바빴지만, 정작 아빠의 죽음에 대해 느낀 감정을 그대로 얘기하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훨씬 쉬웠고 슬프지 않았다. 이렇게 아빠를 얘기하는 것,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신기하기까지 했다. 대화를 하면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를 생각해보는 것. 그로부터 삶의 자세를 만드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아빠가 돌아가신 후부터 아빠의 죽음만을 생각하고,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의 이별만을 걱정하고 있었던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곧 삶을 대하는 자세라는 말이 너무나도 정확하다.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죽음만을 생각하고 살고 있던 나는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학기 중국철학 수업에서 ‘주체적 인간상’에 대해서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주체성이 많이 부족한 사람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청년포럼 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더 이상 아빠의 죽음에 대한 미움도 아니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걱정도 아닌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물론 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어떤 정의를 내린 철학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 종교는 이미 갖고 있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 어딘지, 또 영원한 삶이 있는지도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청년포럼에서 느꼈던 바와 같이 나는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죽음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내가 찾은 답은 이렇다. 죽음은 삶의 저편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순간을 동반하는 삶과 동일한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나라면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포럼에서 아빠의 죽음을 이야기한 후부터 죽음은 더 이상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나만의 주체적인 삶의 자세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어른만이 죽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른만이 죽음을 생각하거나 준비하는 것은 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다. 만약 운이 안 좋아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죽음의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 죽음의 연습이란 예상치 못한 죽음이 찾아 왔을지 라도 남겨진 사람을 너무 슬프게 하지 않게끔 매 순간 후회가 남지 않게 사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나답게 살고 죽어가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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