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생사관이란─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사(未來共創新聞社)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나는 ‘일본인의 생사관’에도 과거·현재·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인의 과거의 생사관과 현재의 생사관을 거쳐 미래의 생사관을 말해 보고자 한다.



근대까지 일본인의 생사관  

우선 ‘생사관’이란 ‘죽음’과 ‘삶’, ‘사자’와 ‘생자’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자기 인식을 말한다.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말기 일본인의 생사관의 양상을 이야기한 수필집이 있다. 요시다 겐코(吉田兼好, 1283경∼1352경)의 '쓰레즈레구사(徒然草)'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많이 읽어지는 고전 베스트10의 하나로 손꼽힌다. 겐코(兼好) 법사는 30살 전후의 젊은 나이로 출가둔세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쓰레즈레구사(徒然草)'로 적어 놓았다. 쓰인 내용은 후세의 우리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쓰레즈레구사' 중에서 겐코 법사는 ‘죽음’이 항상 발밑에 살며시 다가오고 있다고 여러 번 경고한다. 그 경고에 대한 민중의 반응을 “소를 파는 자가 있었다.”에서 시작되는 제93장에서 묘사하고 있다. A씨가 “내일 소를 팔겠습니다.” 라고 하여 B씨와의 거래를 성사시킨 바로 그 밤에 소가 갑자기 죽어버렸다. 하룻밤 차이로 소를 팔지 못했던 A씨는 손해를 보고, 목숨이 짧은 소를 살 뻔했던 B씨는 이득을 보았다고 소문이 났다. 그러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죽음은 살아있는 자에게 갑자기 찾아온다고 깨달은 A씨는 내일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게 살아남은 하루의 목숨이 만금(萬金)보다도 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손해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하루의 목숨의 중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A씨만이 아니지 않는가? (B씨도 그렇다)”라고 비웃었다. 어떤 이가 또다시 “존명(存命)의 기쁨을 즐기지 않고 향락과 재산을 쫓는 데에 정신이 없으면서 자기가 장차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죽음이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기 때문이야. 생사의 이치를 어서 깨달아야 돼.” 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더욱더 비웃었다.

겐코는 어떤 이를 비웃은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았다. 한 일화를 제시했을 뿐이지만 다른 장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겐코의 생각은 무상신속(無常迅速)의 인생임을 알고 나면 임종 때에도 당황하지 않는 것과 같이 즉각 각가지 인연을 방하(放下; 출가둔세出家遁世)해서 생사를 뛰어넘는 길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49장에서 겐코는 심계(心戒)라는 스님이 이 세상의 허망함에 싫증이 나서 편히 앉지 않고 언제나 웅크리고 있었다고 칭찬했다.

이 두 장에서 읽어낼 수 있는 중세 일본인의 일반적인 생사관의 특징으로 ①사람들은 죽음과 인접한 실존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②사람들은 돈과 재산과 향락을 쫓지만 죽을 목숨의 하루의 ‘존명(存命)’을 즐긴다는 참된 즐거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③현세는 덧없는 세상이며 살아갈 가치가 별로 없다고 하는 내세 지향이라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세 번째의 염세관(厭世觀)은 금생(今生)의 목숨을 경시하는 니힐리즘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이 무사도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하가쿠레(葉隱)'(은혜를 입은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이 무사의 숙원이라고 하는 생사관)에 계승되고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미화시키는 근대 일본의 생사관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쓰레즈레구사'에는 이 세상에 정토를 실현시키는 것보다 자신의 정토왕생을 바라는 도피적 경향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루 존명하는 것은 만금보다 낫다는 현세 긍정적인 성향도 뒤섞여 있다. 현세 긍정의 낙관주의는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자오집(自娛集)'이나 '낙훈(樂訓)'을 지은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이나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31살의 젊은 나이로 별세한 조숙(早熟)의 천재 다카야마 초규(高山樗牛)의 니체주의에도 계승되었다.



오늘날 일본인의 생사관

다음으로 21세기 현재 일본인의 생사관을 살펴보자. ‘죽음’을 외면하는 경향은 중세·근세보다 오늘날이 훨씬 뚜렷하다. 또 금주주의(金主主義, 츠치다 타가시槌田劭 씨가 명명)는 눈앞의 생활에 바쁜 청 ・ 장년층뿐만 아니라 인생의 쓴맛을 맛보고 영성(靈性)에 눈뜰 법도 한 노년층에도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일본에는 ‘지옥의 심판도 돈대로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돈에게 혼을 영토화(領土化)된 일본에서는 ‘지옥’의 사상이 소멸되었다. 지옥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정토와 극락이라는 ‘내세’관도 없어졌다. 죽으면 끝인 셈이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영성’이 거론되게 되었지만 그 내용은 유령과의 만남이나 심령현상(心靈現象)이나 초자연적 현상 등을 말하는 문맥에서 나온 것이지 만인구제(萬人救濟)의 비원에 사는 실존과 상관연동(相關連動)하는 하늘, 대우주, 신이나 부처의 활동으로서의 영성은 아니다.

근년의 일본인은 왜 ‘죽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눈앞에 나타난 모이를 무작정 잡아먹는 개구리와 같이 얄팍한 쾌락만 쫓아다니게 되었을까? ‘죽음’에서 멀어진 것은 수명을 연장시키는 의학이 끊임없는 발전이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 최대의 어려운 문제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는 말이 아닌가? 오늘날의 일본인은 '쓰레즈레구사' 시대의 일본인보다 더욱 심하게 요시다 겐코가 “소원하는 바가 모두 망상”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돈, 재물, 자산 등등을 획득하고자 “망심미란(妄心迷亂)”하고 있다. 참으로 이 병을 고칠 약이 없다. 그것들을 얻기 위한 ‘돈 벌이’를 으뜸으로 여기는 세태에서 하늘과 통하는 영성은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

 

미래의 일본인 생사관  

그럼 일본인의 미래의 생사관은 어떤가? 나는 과거도 현재도 아닌, 다음과 같은 미래의 생사관에 무한의 희망을 걸고 있다. 그것을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향하고 싶다.

미래의 생사관 첫째: 평소에 ‘죽음이 발밑에 있다’고 하는 긴박감을 가지고 지금을 산다. 임종(죽음)을 미래에 두고 느긋하게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바로 지금’의 일이라는 각오를 동지들과 공유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기(共創) 위해 연대한다.

미래의 생사관 둘째: 현재의 자기 행·불행은 과거의 자기가 행동한 선악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미래)의 자기의 행복/불행은 현재의 행동의 결과가 아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현재의 행동이 보편타당적(普遍妥當的)인 것이 되도록 동지들과 함께 최선을 다한다.

미래의 생사관 셋째: ‘인과의 이법’은 생전부터 사후의 미래까지 한 치도 어김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미래의 생사관 넷째: 죽음이란 육체적 생명에 응집한 기운이 육체에서 흩어져서 우주에 녹여 들어가는 생명현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육체적 고통과 쾌락에서 개방되어서 우주로 돌아간 자기(혼)은 죽지 않는다. 사후의 혼은 다음 생명체에 모일 때까지는 임종 때의 경애(境涯)를 유지한다. 즉 사후의 자기가 더없는 환희에 가득 차면서 자유로운 생명상태를 얻을지, 아니면 평소의 고뇌와 공포에 빠진 비참한 생명상태에서 방황할지는 생전의 행동에 딸려 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하루하루의 행동(혼 닦기)이 중요한 것이다.

미래의 생사관 다섯째: 생전에 사람과 동물, 기타의 여러 생명을 죽이거나 무도하게 남을 괴롭히거나 세상 사람을 속여서 부정한 수단으로 재산을 쌓거나 무자비하게 사람을 죄로 빠뜨리거나 하는 등의 짓을 했다가 맞이하는 임종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바깥에서 보면 영화스럽고 극락왕생을 이룬 것처럼 보이더라도 ‘업보를 끝까지 회피하고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늘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생전의 모든 선악의 행동을 ‘정의의 저울’로 저울질하고 심판을 내린다.

미래의 생사관 여섯째: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대우주에 숨어있음)는 늘 상관연동하고 있다. 현세를 사는 자기의 행동과 기도(祈禱)는 반드시 부모님이나 돌아가신 조상님에게도 그라데이션과 같이 전달된다. 자기가 깊은 감정을 품는 사람의 영혼에 대한 자기의 기도는 한순간에 전달된다. 생전의 죄를 처벌받아서 고뇌의 바다에 빠진 혼이 아이와 손자들의 덕행을 감득해서 구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복권에 당첨하듯 우연히 운이 좋게 구제되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보답은 철저히 생전의 개체생명(그 사람)의 선악에 조응해서 작용한다. 좋은 자손이나 선생이나 제자나 친구·지인과 만나는 것(인연)도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생전의 자기의 좋은 행동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미래의 생사관 일곱째: 인과의 보답을 큰 시간 간격으로 잡으면 생전부터 사후까지 영원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 사람이 참으로 올바른 삶에 눈뜨게 되면 그 인(因), 그리고 과보(果報)는 동시에 온다. 그것은 연밥과 꽃이 동시에 나오는 데에 비유된다. 그것을 공자는 “아침에 도를 물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라고 말씀하셨다. 혼의 차원이 전환됨으로써 과거의 온갖 죄장(罪障)이 순식간에 빛을 바라게 되고 행복에의 궤도에 오른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는 바로 그것을 이른 말이다.

미래의 생사관 여덟째: 만물만유는 죽음과 삶을 반복하고 있다. 우주전체가 생사유전(生死流轉)하고 지구라는 별은 우주의 기운이 응집한 생명체이다. 생명체인 지구의 환경이 병드는 것은 인간의 병고가 되기도 한다.

미래의 생사관 아홉째: 인간은 우주생명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다. 신령님이든 부처님이든 지극히 존귀한 생명은 모든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현실의 인간이 불행하면 그것은 일시적으로 본래의 자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자기에 눈뜨게 하는 것은 먼저 눈뜬 각자(覺者)이다. 각자와 범부(보통 시림)은 눈뜨게 되면 모두 평등하게 지극히 존귀한 생명이다.

미래의 생사관 열째: 이상과 같은 미래의 일본인의 생사관은 일본인에 특유한 생사관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인의 테두리를 벗어난 곳에서는 어쩌면 공감의 우대를 공유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생사관에 찬동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함께 일하며 전 인류의 공복(共福) 실현을 향해 패러다임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로 미래를 함께(共) 만드는(創)일=‘미래공창(未來共創)’에의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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