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오카 류(片岡龍) 일본 토호쿠대학(東北大學) 준교수(准敎授)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현대 일본인의 사생관은 각인각색이다. ‘일본인의 사생태(死生態)에 관한 의식조사 보고서’(社團法人倫理硏究所, 2009)에 의하면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람은 많은 사람에 의지하고 있다”, “다른 생물의 희생 위에 삶이 있다” 등은 남녀 모두 긍정적이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 “사람들의 유대나 삶의 의미를 남성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여성도 5~60대에서는 “사람은 결국 혼자이다”의 비율이 다른 세대보다 높고, 2~30대 여성이 “사람은 결국 혼자이다”, “죽으면 무(無)로 돌아갈 뿐이다”는 생각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 점과 상반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사후의 세계, 영혼, 윤회에 긍정적인 20대~40대와는 다른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남녀, 세대 차이뿐만 아니라 가정 ‧ 지역 ‧ 직업 등의 환경과 개인적인 경험 차이도 아울러 생각해보면 ‘일본인의 생사관’을 한 유형으로 대표시키기보다 “그 다원성을 인식하는 것이 연구자의 바람직한 태도”(호리에 무네마사堀江宗正, ‘日本人の死生観をどうとらえるか’, 2014)일 것이다.

일본인의 사생관을 역사적으로 볼 때 “돌발적인 재해를 일으키는 자연조건과 불교‧신도와 조상에의 제사, 유교와 무사도 등의 문화적 배경은 일본인의 사생관에 강한 영향을 미쳐왔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인은 개국에 따른 다량과 급속한 정보의 유입 속에서 정체성이 동요되고 사생관도 크게 흔들렸다. 전시(戰時) 체제하에서는 편협한 사생관이 개인에게 강요되었고, 전후(戰後)에는 그 반동으로 사생관에 대한 관심이 저하된 시기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가 근년에 겨우 냉정한 눈으로 삶과 죽음을 응시하고 생각하는 기운이 양성되고 있다.”(이시마루 마사히코石丸昌彦 외, 『生死學入門, 放送大學敎育振興會, 2014) 
여기서 “돌발적인 재해를 일으키는 자연 조건”이 일본인의 사생관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은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대지진을 직접 겪은 나로서는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이다. “근년에 겨우 냉정한 눈으로 삶과 죽음을 응시하고 생각하는 기운이 양성”된 이유는 사회의 고령화가 가장 큰 원인일 수 있겠지만, 전쟁과 재해로 인한 생명의 위기 상황이 사생관을 자각시킬 계기가 된 면도 있다. 
“돌발적인 재해”의 영향은 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변덕스러운 자연재해의 위험에 늘 노출되는 가운데 일본인은 운명을 감수하는 수동성과 지난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낙천적인 근면함을 길러왔다.”(같은 책) ‘태풍일과(颱風一過)’라는 말처럼 태풍이 지나간 뒤의 맑디맑은 하늘은 조금 전까지의 폭풍우를 거짓말처럼 느끼게 한다. 일본인이 재해 경험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 물리학자이자 문학자인 데라다 도라히코(寺田寅彦)는 “천재(天災)는 잊을 무렵에 찾아온다.”고 하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그러나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 피해민에 대해 결코 ‘운명을 감수’하라고는 말할 수 없다. 또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버려놓고 “없었던 것으로 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3.11 이후에 동북지방에서 생활하는 자의 실감으로는 지진을 통해 일본인의 사생관에 뚜렷한 대립 ‧ 갈등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상황은 다양하고 복잡한 ‘일본인의 사생관’의 현황과 역사의 밑바닥에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는 내가 피난소에서 활동했을 때 체험한 두 가지 대립·갈등의 예를 들어보자. 
하나는 피난소에 애완동물을 동행 ‧ 동반하는 것의 여부를 둘러싼 대립 갈등이다. 인간조차도 경우에 따라서는 못 들어갈 정도로 좁은 피난소에 왜 동물을 데리고 오느냐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무너진 집에 애완동물을 두고 먹이를 주기 위해 피난소에서 다녔던 사람도 많았다. 애완동물을 데려온 사람은 대부분 독거하는 사람이어서 애완동물은 가족과 같은 존재이니까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당시 나 자신은 그것을 개인주의적으로 보고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일본인과 동물(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얕았다고 반성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는 재해 때에는 애완동물과 함께 피난하는 것을 권장하지만 동행은 반드시 동반(같은 실내에서 키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는 2018년 2월에 환경성(環境省)이 제시한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여기서 문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책보다도 이것을 통해 인간의 생명과 동물(자연)의 생명과의 관계를 일본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일종의 생사관 대립 ‧ 갈등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대립 ‧ 갈등은 ‘죽으면 끝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생각의 차이이다. 피난소의 같은 방에 제멋대로인 행동이 많고, 피난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욕설만 하다가 고립되던 대략 70대 정도의 남성이 있었다. 그는 이전에는 선원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자랑하면서 그 경험에 비추어보면 피난소 생활 따위는 마치 유치원과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재 상황에는 전혀 적응하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을 싫증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주위 사람들과 대립 ‧ 갈등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 남성의 ‘죽으면 끝’이라는 생사관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양일보’ 6월24일자에 기고한 나의 동세대이자 같은 토호쿠대학(東北大學)의 모리 이치로(森一郞) 교수는 1947~1949년생(현재 70대)의 이른바 ‘단괴(團塊)의 세대’를 가리켜 원자폭탄 투하 직후에 태어났고 냉전 체제하에서 핵전쟁의 공포에 위협받으면서 자란 ‘원폭세대’라고 부르면서, 그들에는 ‘세계의 끝’이나 ‘죽으면 끝’라고 중얼거리는 허무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과 대결하는 자세(세계에 대한 사랑)를 밝혔다. 
나도 모리 교수와 같은 입장이지만 그 사생관의 대립은 단지 모리 교수가 ‘원전 세대’라고 부르는 우리 세대(1960년대에 태어남)와 ‘원폭 세대’(단괴의 세대) 사이의 대립에 그치지 않고 ‘일본인의 사생관’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립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신화에 일본의 국토를 낳은 이자나기 남신(男神)과 이자나미 여신(女神)이라는 일본 최초의 부부 이야기가 있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을 낳다가 죽고 아내를 되찾기 위해 이자나기는 황천(黃泉)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거기서 몸이 썩어가고 있는 이자나미의 모습을 보고 겁을 먹은 이자나기는 황천에서 도망쳐 버린다. 이자나미가 쫓아오자 이자나기는 큰 바위로 길을 막고 우리는 헤어지겠다고 맹세한다. 이자나미가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을 하루에 1000명씩 목매어 죽이겠다.”라고 저주하자, 이자나기는 “나는 하루에 1500채의 산실(産室)을 짓겠다.”라고 대답한다. 
이 이야기는 죽음이 쫓아오는 공포라는 것과 ‘죽으면 끝’이라는 사생관을 나타내고 있다. 이자나기 신은 ‘사후의 세계’와 소통할 가능성을 막아 버렸다.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죽음에 대해 그는 다른 생명을 더 많이 낳는 것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아마 재배문화(栽培文化) 이전(조몽시대繩文時代 전반까지)의 사생관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 신화 속에도, 또 조몽시대 후반기(약 5000년 전~ )의 토기와 토우(土偶; 조몽시대에 인간(특히 여성) 혹은 정령을 본떠 만들어진 진흙인형-옮긴이)의 문양에서도 죽음이 삶과의 단절이 아니라 재생(再生)이라고 하는 생각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과 재배문화 이전의 생사관의 두 가지가 대립 갈등하면서 함께 저류로 흐르고 있는 점이 일본적 사생관의 특색일 것이다. 
여기에는 생물 식물(자연) 생명과 인간 생명의 관계에 대한 생각의 대립이 얽혀 있다. 식물의 재배는 어떤 의미에서 자연의 생명을 인간이 제어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면 인간의 생명도 재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악용되면 생명의 서열화와 통하게 된다. 
한편 채집 ‧ 수렵문화에서는 인간은 자연에 따를 수밖에 없다. 동물 식물(자연)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별로 차원이 다르지 않는다. 이것도 역시 인간 생명의 경시와 쉽게 연결될 면이 있다. 
향후의 바람직한 사생관은 이와 같이 대립 갈등하는 사생관의 대화에서 공창(共創)될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18세기 동북지방의 사상가인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사생관, 즉 인간은 살에서 태어나고 쌀로 재생된다고 하는 독특한 생각은 다시 재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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