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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 한·일 국제학술회의 발제 - 한국인의 생사관 Ⅰ
동양포럼 / 한·일 국제학술회의 발제 - 한국인의 생사관 Ⅰ
  • 박장미
  • 승인 2018.08.05 2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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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한국인은 삶과 죽음에 관해 역사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면면히 계승되는 공통관점이 있다. 이를 일컬어 한국인의 생사관이라고 한다. 먼저 개인과 개인, 세대와 세대 사이, 서로를 살리는 상생을 강조하며 저승보다 이승을 중시한다. 또한 한국인은 억울한 사람에게 억울함을 풀어주고,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도리를 중시한다. 앞의 것을 해원상생이라 한다면, 뒤의 것은 보은상생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삶에는 서로와 세대 사이를 살리는 상호호혜성의 윤리의식이 배태되어 있다. 이는 삶에 대한 가치관은 ‘상생의 태도’로 나타난다. 한국인의 생사관은 생과 사를 생사상생(生死相生)의 ‘한’으로 바라보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삶을 죽음으로 살리고 죽음을 삶으로 살리기에 한국인의 생사상생은 ‘한’으로 집약된다.

아울러 죽음에 대해서는 일상생활을 통해 덕(德)의 실천으로 대비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돌아간다는 이치를 상기하면서, ‘생사일여(生死一如)’에 대비한다. 생사일여로 ‘덕’을 베풀고 죽음에 이르러 ‘완덕(完德)’에 이르도록 한다. 또한 한국인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존재중심, 고요에 이르도록 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예비의 길이 ‘명상치유’로 나타난다. 명상치유의 길에서 한국인의 도와 덕은 합치된다. 인생의 길은 여러 사람과 함께 살아가지만, 실상은 홀로 길을 간다고 할 것이다. 그 길에서 별들의 속삭임을 듣거나 화려한 꿈을 꾸지만 창백한 대지의 품을 원망도 하며 산다. 삶에서 더 이상 바랄 것도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음을 느낄 때 이승의 길을 하직한다.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와 평화를 위한 깊은 잠으로서 죽음을 청하게 된다. 죽음은 ‘혼비백산(魂飛魄散)’으로 읽혀진다. 임종에 이르면, 넋이 날아가고 사지가 흐트러지며 놀라서 곡을 한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죽음은 알 수 없는 미지세계이다.

생사상생의 ‘한’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생사관은 삶을 죽음이 보완하고 죽음을 삶이 보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둘이며 하나이고 하나이며 둘이다. 생사상생의 관점에서 인간존엄(人間尊嚴)은 한국인이 공유하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한다. 인간존엄은 인간이 한국인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근거가 된다. 생사자유의 문제도 ‘간섭받지 않을 자유’가 되는 ‘소극적 자유’의 의미와 함께,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적극적 자유’로서 향유하기를 원한다. 이 자유는 프랑스 혁명가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와 상통한다. 자유는 ‘인간존엄’으로, 평등은 ‘기회균등’으로, 박애는 ‘차등원칙’으로 살리게 된다. 오늘날의 고령화 사회에서 차등원칙은 최소 수혜자, 즉 고령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복지에 기여함으로 생명살림에 중점을 둔다.진여실상에서 바라보면, 삶과 죽음이 나뉘지 않고, 존재와 비존재도 나뉘지 아니하는 무분별의 청정심(淸淨心)으로 ‘한’이다. 생명의 파도와 생명근원의 바다는 동일한 ‘한’이다. 파도가 사라졌다고 누가 바다가 없어졌다고 주장할 것인가? 개체생명의 사라짐을 굳이 이름을 붙여 ‘죽음’이라고 부르지만 방편의 시설에 불과하다. 진여실상에서 죽음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생명파도와 생명근원의 바다는 ‘한’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기에 일상에서 청정심으로 깨어나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명상으로 치유한다. 죽음은 생명의 욕망파도가 낳은 물결이다. 삶 너머 죽음이 있고 죽음 너머 삶이 있다. ‘거짓 나’에 대한 집착을 떠나 참 본성이 함께하는 ‘한’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참 본성의 영성회복이 죽음의 파도너머 ‘한’의 생명바다에 복귀하는 길이다. 이 ‘한’에 한국인의 생사문제 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생사의식은 무교전통에 나타나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영혼이 들어가면, 생령(生靈)이고 사후 저승으로 가면 사령(死靈)이다. 사령은 다시 조령(祖靈)과 원령(寃靈)으로 나뉜다. 순탄하게 저승길을 간 경우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경우로 구분한다. 이처럼 무교전통에서는 생자중심이며, 이승중심이다. ‘황천기(黃泉記)’에 의하면, 저승은 지옥과 극락으로 나뉘고, 지옥은 ‘칼산지옥’, ‘독사지옥’ 등의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저승에서 다시 이승으로 환생하는 것을 절실하게 반기게 된다. 이승의 살아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천도하려는 의지력을 높이 평가하고, 죽은 사람에 대한 생자의 책임의식을 중시한다.

무교전통은 고려시대의 국교, 불교와 습합현상을 나타내면서 영혼천도에 대한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 가 영향을 미쳤다. 중음계(中陰界)의 적응여부에 따라 환생이 결정되기에, 수륙재에서처럼 무주고혼을 위해 생자와 사자의 협력을 중시하게 된다. 사자는 세 개의 바르도(Bardo: 사후세계)를 통과하는 시간의 길이에 따라 49일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여기에서 염라대왕을 포함한 시왕의 심판을 받기도 한다. 이 심판에는 이승에서의 인과율이 반영되어 있다. 선악(善惡)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고락(苦樂)으로 이숙(異熟)하기 때문에,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로 나타나 이승에서의 올바른 삶을 주문하기도 한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가 공인되면서, 이승의 현신에서 저승의 ‘중음신’으로 바뀌는 것을 옷을 바꾸어 입는 것으로 간주해 죽음에 대해 초연함을 나타냈다. 이 과정에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강조하고 사자의 업식(業識)을 정화시키는 천도의 재를 중시했다. 아라야식을 통해 살아생전의 의식이 종자로 저장되었다가 육도환생으로 발현되어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보편의식을 공유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이승으로 돌아오는 통과의례라고 믿으면서 죽었다고 업의 종자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업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천상, 인간, 수라, 아귀, 축생, 지옥으로 윤회한다고 보고, 업식(業識)이 완전히 정화되기까지 윤회한다는 신념체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깨달음은 해탈로 이어지기에, 고려 지눌은 '공적영지'(空寂靈智)를 표방하면서 참된 성품을 깨달아 생사를 초월하는 길이 있음도 함께 제시했다.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이 한국인의 신념체계를 지배하면서 무교, 불교의 요소와 습합되어 죽되 죽지 않는 새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기의 응취과정(凝聚過程)에서 이루어진 정기신(精氣神)이나 그 결합체인 혼백(魂魄)으로 이루어지고, 일정기간 삶이 지속되다가 수명이 다하면, 양의 기운의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음의 기운의 백은 흩어지기에 ‘혼비백산(魂飛魄散)’에 대한 공통관념이 형성되었다. 개체생명으로 살펴보면, 일기(一氣)의 모임과 흩어짐의 변화양상이 다양하게 드러나지만, 우주생명으로 조견하면 일기의 존립근거가 성리(性理)의 소산이 되기에 본성적으로 인간은 영생(永生)이라는 이치를 체득하게 되었다. 죽음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한’으로 사인(死人)은 귀인(歸人)이다. 우주생명 차원에서 원기(元氣)가 펼쳐지면 삶은 신(神, 伸)이고, 죽음은 돌아가는 귀(歸, 鬼)이기에 실상은 생사일여라는 관점을 유지한다. 따라서 귀신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음양기운의 한 양태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특히 유가인성론에서 말하는 ‘본연지성’은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심성'이며, 사리사욕이 없는 천부자연의 심성이다. 이 본연지성에 비해, 개체생명의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이다. 노력과 수양에 따라 기질의 탁한 것을 맑은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에 기질을 정화하고 본연지성을 발현하게 하는 교육을 중시했다. 선비들은 귀신을 본다는 것이 정신이 병이 들어 헛것을 본 것에 불과하기에 일종의 안병(眼病)으로 생각했다. 서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제사를 통해 조상신을 모시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조상신을 모심으로 후손은 조상신과 기감(氣感)으로 소통하고 발복(發福)하는 요인이 되었다. 일찍이 공자가 귀신에 대한 관심보다 삶에 대한 열정을 앞세운 것처럼, 한국인은 저승보다 이승관심이 우세한 편이었다.

이렇게 써놓고 생각해보니, 과연 오늘의 한국인에게 한국적 생사관이란 게 있는가라는 문제를 새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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