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주관성의 우위에 합리적 의문을 제시하고 이성과 객관적 논리에 우월한 지위를 부여한 자연철학 이후로 인간은 '학문'이란 객체를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인간의 감성을 개인적 성향의 발현이 용이한 분야에 유보한 후, 이성(理性)을 그 분포의 한계점으로 하여 인간사회와 역사는 근대라고 명명된 지점까지 합리성을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합리성'과 '학문'은 근본 논리의 제공과 그 현상적 모습이란 관계로 서로를 구속하고 있어야 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구분자체를 의문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게만 교육과 그 개혁의 정의를 맡긴 듯하다. 교육의 정의와 그 개혁의 노력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이즈음에서 짚어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학문과 합리성의 의미와 그 효용성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이어야 한다. 어느 한 시대의 사조(思潮)에게 절대적 신임을 주고 그 평가를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는 이성적 자유와 학문의 효용성을 연동시키고 있다. 경제발전에 성공한 국가들이 누리는 현대적 쾌락주의는 합리성의 발전이란 역사에서 파생되었다. 역사발전의 결과가 '입에 맛난 음식'과 '이성과 감정 구분의 무용론'에 의거한 물질적 가치의 극대화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근대의 이성이 그러한 역사의 흐름에 조력한 자신을 어찌 평가하겠는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교육의 현실과 이 시대가 지향해야 할 교육개혁의 가치에 관한 논의가 이미 현대적 의미를 상실했다는 듯 그에 관한 모든 논쟁은 기술적인 것만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적 질량을 최소화할수록 형식적 의미만 극대화된다는 인문학적 인간의 본성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갑과 을이라는 두 젊은이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갑은 그 누가 보아도 신체적 조건으로나 학습능력으로나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적절한 운동을 한 후 동네 골목을 청소한다. 그리고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나서 학교에 가서 모든 과목을 열심히 공부한다. 반면에 을은 잘 생겼다고는 볼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로서 늦잠을 종종 자며 학교 성적도 높은 편이 아니다. 이즈음에서 이 두 젊은이를 평가하는 것이 정당한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적 환경이 동일하다는 유클리드(Euclid)적 공준이 허용되어야 한다. 갑이 그 탁월한 외모와 성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인생목표는 남들이 정해놓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남들이 좋다고 정해놓은 직장에 가서 안정적 수입을 얻는 것이다. 반면 을은 자신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며 삶의 가치와 생명의 의미를 밝히고자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다고 하자. 시대의 구분을 초월하여 역사의 통시성(通時性)이 을을 위해 편중되어야 학문적이고 교육적인 것이 아닐까?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어떤 사람들은 25세에 죽어서 75세에 묻힌다.'라고 했다. 50년 동안의 무의미(無意味)를 행복의 극대가치로 전락시킨 현재의 우리 시대가 교육개혁에 대해 논한다면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교육개혁에 관한 왈가왈부가 이미 그 가치를 잃고 그 어떤 모습으로 귀착되던지 상관없이 역사적 의미를 선제적으로 잃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개혁을 부르짖으며 논쟁의 소재로 끼워 넣는 대입제도, 학과목 운영방안, 평가제도, 등등의 수많은 객체들이 이름만을 덩그마니 한 손에 들고 쟁점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기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형식적 방법들은 이미 수도 없이 논의되었고 교육선진국들의 사례와 우리나라 역사 자체에서 모두 제기되었다. 이 방법들을 이름과 절차와 색깔만 바꾸어서 또 다시 진열장에 전시하는 것으로 정권마다 그 소임을 다 한 것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너무나 당연히 여기에 있다.

사실주의(寫實主義)의 함정에 매립된 가치의 정의를 다시 찾아야 교육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교육개혁은 그 과정에서 자연히 실체적 모습을 게 되어야 한다. 존재의 가치가 '먹기 위해 사는'것에 철학을 주입하여 '학문'의 최종목표가 육신적 평안과 물질적 풍요에 부응한다는 설정을 그대로 두고 교육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딱한 일일 뿐이다. 현재 우리는 예상평균수명이 100세를 넘고 있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죽은 후 70년이 넘어야 땅에 묻히는 시대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진정 교육개혁을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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