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정문 앞에 세워둔 노숙자 동상. 담요와 클러치 백을 끼고 바삐 걷는 그의 수염과 긴 손가락을 쥔 채 구두를 밟으면 행운이 따른다는 얘기가 떠돈다. 작은 동상 하나에도 쿠바노의 아르떼가 깃들어 있다.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앞에선 호객꾼 음성마저 성스럽게 들린다. 호화 유람선은 동상이 치켜든 십자가를 깃발 삼아 관광객을 떠민다. 육지 멀미에 시달릴까봐 고급 호텔 몇 개가 입을 벌리고, 뙤약볕에 휘청거리던 관광객을 익숙하고 편리한 세상으로 소리 없이 빨아들인다. 색다른 목소리에 갈증 난 사람만 무리에서 뛰쳐나와 광장을 서성거린다. 낯선 곳의 소리를 연인에게 전하지 않고선 못 배겨 우체국 기웃거리는 사람은 그리웠단 걸 증명하려고 엽서를 사고 침 묻힌 우표를 붙인다. 여행 경비 모자랄까봐 문 활짝 열어 둔 현금인출기에선 마른 논에 물 대는 소리가 난다. 기념품 상점이나 노점은 그 소리를 듣고서 그들 따끈따끈한 주머니만 노려본다. 그들에게 광장은 레게음악에 맞춰 어깨 흔들다보면 안개 헤치며 모습 드러내는 블루 오션이다.

성당을 낀 골목에선 예고도 없이 오케스트라 공연이 펼쳐진다. 공원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사람이 하나 둘 모여들고, 서른 즈음 여자가 예닐곱 살 딸아이 손을 잡고 겅중겅중 다가온다. 어깨 앞뒤로 바삐 흔드는 여자애가 박자 맞춰 엉덩이 돌리는 걸 보면 개인 레슨을 오래 받은 것 같다. 원주민 차림 할머니도 질세라 능숙하게 허리며 어깨를 휘돌린다. 할머니와 여자애가 골목에서 벌이는 살사의 배틀, 말 한 마디 없이 몸짓으로 의사를 주고받는 쿠바 특유의 방식이다.

대성당 맞은편 상공회의소에선 상거래에 관한 모든 일이 소리 없이 이뤄진다. 까사에선 뜨리니다드 앙꼰 호텔 예약 하려면 거길 가면된다고 알려줬고, 여행사 찾으려고 샅샅이 뒤졌지만 간판이 보이지 않아 묻고 물어서 겨우 찾았다. 그들 의사소통법을 진작 알았더라면 여행사 찾아가는 게 그토록 짜증스럽진 않았을 텐데. 입간판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금빛 동상,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중이다. 상공회의소를 등지고 성 프란시스코 광장을 바라보는 그들 뇌와 심장이 송두리째 파여 있는 게 뜨악하다.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속까지 뒤집어가며 열변 토하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패러디물은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광장을 가로질러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정문으로 걸음을 옮겨가면 누구든 반겨주는 붙박이 오브제가 더러 있다. 도로에는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는 노숙자 동상이 세워져 있다. 머리며 수염을 기른 채 옆구리에 클러치 백과 담요를 낀 후줄근한 차림새다. 훌쩍 큰 키며 긴 손가락으로 봐서 인텔리로 보이는데 하필이면 가난한 곳으로 오게 된 까닭이 몹시 궁금하다. 파리에서 왔다는 그가 아바나에다 불어 넣어 준 고매한 예술혼은 어떤 것일지. 아직 아무런 영감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의 턱수염과 기다란 손가락을 쥐고 구두를 밟으면 행운이 따른다는 속설을 믿고 몰려든다. 어려움에 처한 그를 쿠바노가 보살펴 줬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고루 나눠주라는 뜻이 담긴 듯하다. 휴머니티가 살아 있는 쿠바는 여자 혼자 여행와도 아무 걱정할 필요 없는 최적의 장소다.

성당 뒤편 사람 들끓는 곳에 객차가 전시되어 있다. 길거리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는 곳에 꼬체 맘비(coche Mambi)가 놓였다는 게 뜬금없지만 미국 에어포스 원이나 마찬가지인 대통령 전용 객차를 전시한 건 자본주의와 결탁한 탓에 부패했던 바띠스따 대통령의 호사스러움을 경계하자는 뜻이다. 겉보기엔 일반 객차와 다름없지만 침대까지 갖춰져 내부는 호텔 못잖다. 둘러보기만 해도 당시의 부패상이 짐작되기에 입장료 없이 누구나 볼 수 있게 한 모양이다.

호객꾼 성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뒤늦게 걸음을 옮겨간다. 아무리 살펴도 십자가 높이 든 수도사뿐인데 환청을 들었던 걸까. 동상에 새겨진 기도란 제목을 본 뒤 그가 관광객을 불러들인 게 틀림없다는 걸 직감한다. 소년을 껴안은 채 인류 평등을 부르짖는 동상은 보기 드물게 온통 검은 색이다. 아프리카에서 데려 온 노예의 고달픔을 대변하는 수도사 거룩한 몸짓이 세월을 곰삭이고, 노간주나무처럼 푸르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흑인이 마음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같다.

성당 정문에 들어서면 경비원 대신 형체 없는 철갑옷의 동상과 만난다. 프랑스 혁명이 무대가 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펼쳐 든 그는 권위에 휘둘리기만 했던 불쌍한 사람이 틀림없다. 그가 전하는 마음의 소리는 오랜 혁명 기간 동안 죽어간 백만 명을 위로하려는 듯해서 모골이 송연하게 한다. 텅 빈 청동 갑옷을 세워둔 건 그때 죽어간 누군가의 얼굴을 상기하라는 깊은 뜻이 담긴 듯하다. 한 사람 얼굴만으로는 쿠바의 아르떼가 충족되지 않아 예술적 가치를 드높이려고 비워둔 그들 아이디어가 놀랍다. 그걸로 봐도 쿠바노의 아르떼에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강한 메타포에다 묵직한 소통 기술까지 직조되어 있다는 게 증명된다.

쿠바노의 세세한 설명을 대신하는 조형물 여럿을 둘러본 뒤 성당에 들어선다. 벌어진 입을 닫고 성호 그리라는 환청이 대리석 바닥에 근엄하게 깔린다. 마음 정갈하게 하고서 회랑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디뎌 올라 다다른 종탑. 신이 아니고선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에서 마주친 희끗한 머리의 알레한드로. 대대로 종지기가 되어 아바나의 아침을 깨우는 그의 얼굴엔 미소 말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하루 일과를 종소리로 마감하듯 성 프란시스코 광장 투어는 대성당 종지기 알레한드로를 만나는 걸로 속세의 때를 씻고 화려체의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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