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강촌 임긍호 지사의 3대 이야기

정화자(수필가)
독립운동가 강촌 임긍호 지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광복절이 다가온다. 외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외할아버지는 독립투사이시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성명 임긍호

생존기간 1901. 4. 27. ~ 1964. 3. 14.

출생지 충남 청양

운동계열 임시정부

훈격(연도) 애족장(90)

공적내용 충남 청양(靑陽) 사람이다. 1923년 3월에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大韓民國)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 활동했다. 1925년 1월 중국의 혼란한 정국에서 상해지역 곡립운동의 근거지인 프랑스 조계(租界)에 대한 경비를 위하여 상해 교민단(僑民團)에서는 의경단(義警團)을 조직했는데, 그는 황채성(黃蔡性)‧김우진(金宇鎭)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1조에 속하여 경비 활동을 했다. 동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와서 자금모집활동을 펴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나의 외가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 물안이 마을이다. 그 마을은 25가구에서 애국지사 열두 분(8위는 공훈 대상, 4명은 비지정)을 배출한 고장이다. 그중 4위가 평택(平澤)임(林)씨 충정공(忠貞公) 계(系)이고, 외할아버지는 송파공파 14대손이다.

청양 칠갑산 사책로 입구에 높이 10m의 충혼탑이 서있다. 그 옆에 추앙받는 622위의 지사들이 기록된 지석(誌石)이 있는데,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는 외할아버지 강촌 임긍호 지사와 다른 한 분뿐이다.

외할아버지는 맏아들로 태어나서 열한 살에 장가들고, 외할머니는 열네 살에 시집오셨단다. 외할머니가 밥을 지으면 외할아버지는 부엌에 와서, 장단 맞춰 등을 두드리며 누룽지를 긁어 달라고 조르셨단다. 일찍부터 한학과 신학을 공부한 할아버지는 열여섯 살에 맏딸인 우리 어머니를 낳으시고, 부모님, 처, 예쁜 딸을 남겨 놓고 1919년에 상경하여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학문을 넓히다가 192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큰 꿈을 품고 광도고보에서학업에 열중하시던 중,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야기된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고, 분연히 결심하여 학업을 포기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셨다.

상해임시정부에 합세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상해임시정부 김구 선생의 환영과 격려를 받으며, 의경단의 제1조에 임명되었다. 임시정부청사 경호는 물론 국내에서 비밀리에 들어오는 독립자금을 안전하게 수송하는 일을 맡았다. 독립군 중에도 간첩으로 들어와 일본과 내통하는 자도 있고, 또는 변절자들을 색출하여 책벌하는 일도 하셨단다.

임긍호 지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명목으로 고향에 사는 거부인 사촌으로부터 900원을 송금 받아 자금이 부족했던 임시정부에 큰 힘이 되었다. 성심여대 이현희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그 당시 900원은 소 60마리와 백미 120가마의 값어치였다고 한다.

다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부여 형무소, 청양 형무소에서 문초당하시며 옥살이를 하셨다. 옥살이하고 난 후에도 ‘요시찰’ 대상이 되어 일본 경찰이 붙어 숙식하며 심지어는 화장실 가는데도 지켜서 있었다고 한다.

일본 당국에서는 임시정부를 밀고만 하면 대전에 큰 회사를 통째로 주겠다는 제안을 무수히 받았으나 응하지 않으시고, 시골 농촌에서 감시를 받으며 동네 입구에 성냥 몇 갑, 석유 기름, 주전자에 막걸리 파는 작은 가게에 날마다 출근하듯 가셔서 오가는 사람과 막걸리 자시며 고문으로 아픈 몸의 혈 풀리는 산약을 드시며 세월을 보내셨다.

대농의 농사를 머슴을 두고, 행랑채에 부엌살림을 도와주는 부부를 두어, 오가는 사람들 에게는 숙식을 많이도 제공하시곤 했다. 그런 중에도 비가 안 오면 벼를 못 심고 고구마나 메밀을 심어 먹던 천수답을 위해, 저수지를 근동에 두 군데나 만들게끔 하셨다.

시골에 묻혀 꿈도 버리고 사시다가 그리도 염원하던 8·15 광복이 되어, 권총을 차시고 힘을 합쳐 나라를 새로 세우자고 할 때에, 위대하신 김구 선생님의 서거 소식에 울분과 비통함을 안고 여생을 보내시다가, 5남매의 자녀를 두고 65세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다.

외할아버지는 5남매를 두셨다. 딸 둘과 아들 셋이다.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맏딸이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가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가 되시어 생이별을 했다. 증조할아버지가 정하신 혼사를 상해에서 듣고 할아버지는 파혼하라고 전갈을 보내왔으나 그대로 진행되자 시집가는 전날 승복차림에 삿갓을 눌러 쓴 모습으로 찾아온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골방으로 데리고 가서 “너 내일 시집가지 마라.”고 명하셨다. 아까운 내 딸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면서 한탄하셨다. 어머니가 “그냥 시집갈래요.”라고 대답하자, 할아버지는 그 밤에 어디론지 떠나가셨다. 그래서 그 신부는 우리 어머니가 되었다.

큰아버지가 서울 종로경찰서에 계셨기 때문에 살림을 서울에 차릴 수밖에 없어서 큰어머니가 떠났고 그래서 어머니가 시조부모님, 시부모님을 모시고 가난한 살림을 꾸렸다. 시집간 지 10여년 뒤에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인천에 이사하여 아버지는 중공업 회사에 다니셨고, 형편이 나아질 무렵에 6‧25가 터져서, 외갓집 근처로 피난을 왔다. 아버지는 몸에 배지도 않은 농사일을 하시며 눌러 살고, 논밭을 사 보태며 열심히 가업을 이루셨다.

큰외삼촌 임승엽은 젊어서 남양군도로 끌려가 갖은 고생 다 하시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외딴섬에 한 무리가 버려져 풀뿌리와 열매 등을 먹고 살았다고 하셨다. 얼굴은 흑인같이 되고 가죽 혁대를 몇 번을 삶아 국물을 먹고 종당에는 제일 살찐 동료 하나를 죽여 삶아 먹자는 말까지 수군수군 거리더란다.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오게 됐는데 기차가 굴 안에서 고장이 나서 칠흑같이 어두운 벽을 더듬어 긴 터널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다고 했다. 간호사가 진찰해 주는데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보이더란다.

근동에 몇 사람 살아 돌아왔지만 쌀밥에 너무 잘 먹어서 얼마 못 살고 죽었다고 했다. 큰외삼촌은 처음에 멀건 ‘미음’, 간격을 두고 걸쭉한 ‘미음’, ‘죽’, 보리 섞은 밥을 먹는 중에 아내인 외숙모가 남편에게 쌀밥을 어른들 몰래 먹이다가 들켜 네 남편 죽이고 싶으냐며 호통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80세 가까이 살다 돌아가셨다. 효성이 극진한 외삼촌이셨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고 3년 동안을 새벽마다 같은 시간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억수 같은 소나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굴건제복 갖추시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소에 찾아가 곡하시고 애도하셨다.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하심을 반대하시고 선산에 모셨다. 3년 후에도 유명한 인물 묘소를 찾아다니며 흙 몇 줌 싸다가 외할아버지 산소에 뿌려주셨다.

큰외삼촌의 아들 임동걸 오빠(나의 외사촌)는 나보다 두 살 위인데 유지들과 힘을 모아서 임씨네 종중회관을 빌려 ‘새마을학원’을 열어, 밤에는 진학을 못한 청소년을 가르치고, 낮에는 ‘양재학원’으로 부녀자의 재봉을 깨우쳤다. 그 운영을 사비로 충당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장서를 공개하여 동네와 인근의 모든 마을 주민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독서를 권면했다. 그런 것들이 ‘복사꽃 피는 마을’이라는 주제의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즐겁게 듣던 것을 뿌듯하게 기억한다.

둘째외삼촌 임승문은 중앙대학교 약대를 졸업하고 대방동에 약국을 차리고 학교 선생님과 결혼하여 시골 사는 조카들, 생질들 여러 명이 외삼촌댁에서 기거하며 공부했다. 그때쯤 외할아버지가 큰 병을 얻어 위독하실 때에 서울에서 밤 열차를 타고 광천에서 내려서 30 리를 걸어오노라면 기러기재라고 깊은 산고개가 있다. 낮에도 혼자 넘기 무서운 고개다. 밤중에 도착하여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고, 약을 먹이고, 한숨 자고 새벽에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 가서 약국 문을 열고 출퇴근하다시피 하셨다. 효성이 남달랐다.

외삼촌 아들이 중국어를 전공했다. 외삼촌도 중국어를 배워서 중국어협회장까지 하셨는데 외심촌의 약국이 당시의 공군사관학교의 이웃이고 셋째외삼촌이 공군장교로서 공사의 국제대외연락실의 책임자였다는 인연으로 둘째외삼촌은 대만에서 유학 온 대만장교들의 어려움을 여러 가지로 지원했다., 그 친교관계가 아주 깊고 넓어서 작고 소식을 들은 대만의 공군장교들이 2017년 4월에 대만정부국방부 포장을 가지고 와서 영전에 헌정하면서 ‘대만정부의 가장 숭고한 경의를 표시’한 일도 있었다.

막내인 셋째외삼촌 임승무는 공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졸업하고 이화대학교를 졸업한 외숙모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고 대령으로 제대했다. 큰딸이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로 있다.

엄마와 이모님은 평범한 가정으로 출가해서 7남매씩 낳고 편안하게 살다 돌아가시고, 5남매 중 막내 외삼촌만 생존해계신다. 외할아버지 손녀인 내가 77세이니 외조부님의 5대까지는 여러 자손이 있다.

우리는 인천에 살다가 피난 와서 외갓집 근처 모퉁이 돌아 집을 짓고 살았다. 나는 청주로 시집와서 살고 있다.

그 옛날 외할아버지는 쓴 나물을 좋아하셨다. 논둑을 다니며 고사리 손으로 씀바귀, 냉이, 지칭개를 뜯어 외할아버지 해드리라고 외갓집에 갖다드렸다.

근동에서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양반이 임긍호 지사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노래를 부르면 마당에 나오셔서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흥이 많으신 외할아버지셨다.

내가 본 외할아버지는 키 크시고 풍채가 좋으셨다. 성품이 불같으셔서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분이었다. 내가 시집오기 전 일이다. 새 양복을 입으시고 버스를 타고 가시던 중에, 소매치기가 어느 남자 조끼 주머니를 찢고 돈을 꺼내는 것을 보시고 큰소리로 ‘소매치기다’ 하며 위기를 넘겼는데, 두서너 명이 선생님 왜 이러시느냐며 말리는 척하더란다. 차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도적들은 내려갔지만, 새 양복은 다 찢겨 못 입게 되었단다. 작은 칼이 앞에 달린 반지를 끼고 말리는 척하면서 양복을 다 찢어 놓았던 것이다.

외증조부께서도 힘이 장사셨단다. 어머니 생전에 들은 이야기다. 하루는 강도 두 명이 들이닥쳐 식구들을 위협하고 돈을 안 내놓으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며 횃불을 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증조부께서 두 놈을 양팔로 싸잡아 내동댕이치며 호통하시니, 강도들이 혼비백산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누차 들었다.

외할아버지 종형제(사촌)가 여러 명이다. 동네마다 좋은 터전에 커다란 기와집은 다 그분들의 집이었다. 어머니 따라 가보면 기둥이 아름다리로 크고 대궐 같았다. 외가들은 다 부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도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외할아버지 증조모께서 가난한 중에도 고양이를 잘 보살피며 키우셨단다. 어느 날 고양이가 지전(돈) 뭉치를 물고 들어와 그 돈으로 논밭을 사서 부자가 되기 시작했단다. 손자 4형제가 모두 부요하게 되셨다. 그중에도 종갓집 큰댁은 청양 군내 거부였다. 집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관리를 해주는 집이다. 시대가 바뀌면서(1949년 농지개혁) 해마다 상환하여 자기들 땅을 만들었다.

큰댁에 장남이 그 시절에 서울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집에 다니러 왔는데, 밀려가던 공산군한테 총살당했다. 결혼해서 임신까지 했는데 남편 죽음에 놀라 낙태되었고 장례 지내던 날 화성면 사람 모두가 슬퍼했다. 휴전이 되고 미국 사람과 통역관이 필요하다고 나라에서 모시러 왔었는데 저세상으로 갔으니 얼마나 원통했을까? 돌아가신 분과 내외종간인 이현재 전 서울대학 총장(국무총리)과 서울대를 나란히 졸업했고, 살아계셨으면 나라를 짊어질 훌륭한 분이 되었을 텐데 아쉽고 통분할 일이다.

이현재 전 국무총리께서는 겸손하셨단다. 우리 어머니를 가끔 만나면 외종누나인데도 만날 때마다마다 절을 올리고 예를 갖추시는 분이었다고 어머니의 칭찬이 대단했다. 총리를 물러나시고도 늙은 노모님 지극 정성 효도하신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외할아버지는 광복 직후에 권총을 차고 조국의 건설에 뛰쳐나오셨는데 어찌하여 외부활동을 다 접으시고 말년을 조용히 시골에 잠적하여 사셨는지 궁금하다. 나는 적이 생각한다.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사건에 분노하고 실망했으며 친일반민족특위에 참여했으나 그 일의 됨됨이가 친일파의 득세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차마 조국을 원망하고 저주할 수가 없어서 좌절(挫折)과 절망(絶望)을 ‘조국의 광복만으로 소원을 성취한 것’으로 승화(昇華)시켜 스스로를 낮추고 줄여서 새 세대에게 맡기는 대도(大道)에 사신 것이라고 믿는다.

외할아버지의 좌우명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마라.’였다.

외할아버지가 1990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는 의미를 생각한다. 옛 어른은 지극히 겸손하여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그러나?’였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스스로를 자랑하지도 않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큰외삼촌의 손자의 회고에 따르면, 외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인정이 되지 않았는데 징용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아드님이 수없이 관계기관에 청원해 된 것이라 한다. 이는 마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이 일본의 호적 말살로 어머니 박씨의 사생아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광복 후에도 호적의 복원에 60년이 걸린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는 일과 함께, 독립 유공자를 비롯한 국가유공자를 우대할 줄 모르는 우리의 풍토와도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그러나 현재는 이런 혜택이 있기는 하다. 외손녀인 나도 보훈병원에 가면 60% 혜택을 받고 치료하고 대상포진 같은 모든 예방주사도 싸게 맞는다. 2018년 1월부터 독립 유공자 손자녀들을 보상 해준다. 인장지덕(人長之德) 목장지패(木長之弊)라 했다. 훌륭하신 외할아버지 덕이라며 기뻐한다. 1월부터 두 달째 15일이면 통장으로 입금이 된단다. 외할아버지 손자녀가 우리 7남매와 23명인데 열 명 훌쩍 넘게 혜택을 받게 됐다. 나는 소득이 많다 하여 보상은 받지 못해도 훌륭하신 외할아버지의 외손녀라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

나를 돌아본다. 시골에서 꽃 피고 새 우는 풍경만 좋아했지 세상을 모르고 살아왔다. 도회지에 나와 낮에는 일하고 야간으로 공부했으면 훌륭하신 외할아버지 뒤를 조금이나마 이어받아 지금보다는 아는 게 많았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80이 다 된 나이에 청주대 수필 창작반에 다니며 노트를 들고 메모하며 훌륭하신 교수님과 여러 선생님들 함께 한다는 걸 영광으로 여긴다.

그리고 광복절에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나라를 걱정한다. 요즘 우리들은 무엇을 추구하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선조들이 어렵게 구해놓은 나라를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키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참다운 해방을 이루고, 독립국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국민들은 외할아버지처럼 견위수명(見危授命, 나라의 위급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하는 생각을 하는지, 그런 선열들의 뜻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지 못내 궁금하다.

나로부터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외할아버지 제삿날에 외가를 방문하여, 그 자손들의 추모의 자리에 함께하고, 외가의 애족 애국하는 대의(大義)와 대아(大我)에 사는 기풍을 내 마음에 재충전하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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