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제주의 4·3사태가 해결되지 않자 미군정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제14연대의 제주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자 지창수와 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기습적으로 전 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선동과 위협으로 인민 반란군을 결성하였다. 이 인민군 3천여 명은 군부대에 인공기를 내걸고“경찰타도,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을 위하여 인민군으로 행동하자”라고 구호를 외치며 시가로 진출하였다.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 거제도가 인공기 물결로 출렁거렸다. 경찰서 등의 관공서가 접수되고 우익인사와 더불어 무고한 양민까지 즉결처분되었다. 정부는 초기 진압에 실패하자 여순지역에 즉시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러나 반란군 소탕작전은 미국 군사고문단이 장갑차와 박격포까지 동원하고서야 진압되었다.

11월 30일자 동아일보에는“우리는 조선의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행복을 위해서 신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를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동족상쟁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거.”라는 글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즉시 1948년 12월 1일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하여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정부 성향의 군인을 제거하면서 철저한 반공국가임을 천명하게 되었다. 미국의 지원은 한층 강화되고 주한 미군철수도 1949년 6월로 연기되었다.

여순사건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신생 정부의 수뇌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기에 충분하였으며 그들을 레드컴프렉스에 걸리게 하는 원인이 되어 모든 정부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자를 묘사할 때‘빨갱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후 붉은 색은 반공교육의 상징적 색깔로 지정되어 공산주의의 혁명성과 아울러 그들을 비하하여 지목할 때 사용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좌익세력의 폭동과 내란 행위의 체벌이 그 목적이었으나 이 법은 일반국민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6월에 이르자 국가보안법 위반자인 죄익의 숫자가 급증하여 산처럼 쌓이게 된다. 정부로써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국가지배 이데올로기 통치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딜레마를 피해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무조건 처벌 방식에서 “선도·교화”의 방식으로 전환을 꽤하게 되는데, 이 때 탄생한 것이 바로 “국민보도연맹”이었다. 국가지배 이데올로기를 보강하려는 수단이었다.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을 통하여 사상의 전환을 꽤하였으며 강력한 반공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이 성공은 박헌영과 김일성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이 땅에 6.25라는 한국전쟁을 불러오게 하는 원인의 한 가닥을 감당하게 만든다. 북한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자 정부는 보련원을 예비 검속하였다가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으로 예단하고 학살을 결정한다. 이 결정은 이승만 정부의 최악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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