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규 청주시 주거환경정비팀장

안현규 <청주시 주거환경정비팀장>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제도에서 ‘아버지’란 한 가족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가계의 존속을 강조하는 우리의 가족제도에서 가족의 우두머리인 ‘아버지’는 가계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자식, 특히 아들을 가계의 대를 물려줄 만한 인물로 키우는 것이 막중한 임무라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특히 장남이 아버지를 생각할 때는 친근감보다는 거리감과 중압감을 더 크게 갖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청주시청에서 30여 년 공직생활을 하시다가 1997년 12월 퇴직하셨고, 향년 76세로 2014년 10월 별세하셨다. 검소하시고 과묵하셨으며, 가족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꾸지람과 함께 엄격하셨다.

지금도 아버지의 꾸지람이 생각나는 게 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여름철의 기억이다. 여름방학이라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나서 수돗가에 있는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목욕을 하고 대청에서 낮잠을 잤는데, 낮잠을 자는 동안 소나기가 왔다. 그때 마당에는 채반에 담긴 묵 말랭이와 건조 중인 빨래가 있었는데 그것을 비 맞지 않게 단속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때마침 집에 오신 아버지가 그 광경을 목격하시고는 파리채(회초리)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종아리를 맞았다. 그리고 “너도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야지”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날도 저녁이 되자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비설거지(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를 했는데, 바람으로 인해 마당에 있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꾸지람이 두려워서 비를 맞으며 안테나를 잡았고, 다행히 안테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귀가하신 아버지는 안테나를 넘어지지 않게 잡고 있었다는 얘기에 또 회초리를 드시고 “넌 왜 이리 생각이 짧으냐?”란 말씀 뿐이셨다. 그 다음날 보니 회초리를 맞은 종아리에 약이 발라져 있었는데 어머니께 물어보니 잠을 자는 동안 아버지께서 발라주셨고, 번개가 피해간 것이 다행이지 큰일 날 뻔 했다고 말씀을 하셨단다.

그 후에도 아버지께서는 우회적으로 많은 꾸지람을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께서는 “너도 이제 컸으니 이제부터는 아버지가 당직을 할 경우 동사무소로 아침에 문안인사를 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사직동, 내덕동, 운천동, 모충동 등 아버지가 당직을 하신 동사무소로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가서 우유나 인삼음료를 사 가지고 문안인사를 드렸다.

공무원은 돈보다는 승진이고, 특히 ‘사무관’은 지방공무원의 꽃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아버지도 묵묵히 일을 하셨는데 사무관의 꿈을 이루시지 못하고 퇴직을 하셨고, 약주를 드시면 가끔씩 아쉬운 마음과 함께 아들인 나에게는 건축공학을 전공했으니 건축사나 시공회사 쪽으로 직업을 택하도록 여러 번 말씀하셨으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외아들인 나는 여러 지역을 떠도는 시공 회사보다 한 장소에서 근무할 수 있는 사무직을 선택했고,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공무원 시험 준비를 부모님 모르게 했다. 그 결과 나는 1991년 8월 보은군에 지방건축기원보로 임용이 됐다.

내가 아버지의 뜻에 반하게 공무원을 택하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속담처럼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마지막 꾸지람(조언)을 하셨다.

아버지는 “상급자의 말씀(지시)에 면전에서 ‘됩니다’, ‘안 됩니다’를 성급하게 말하지 말고, 충분한 검토 후 문서로써 말씀드리고, 동료직원이나 하급자에게는 따듯한 마음으로 챙기고 소통하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공직생활도 어느덧 28년을 맞고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꾸지람처럼 상급자와 동료 직원과 하급자와의 소통으로 화목한 직장 분위기가 조성되면 지금보다 더 시민에게 봉사할 수 있고 시민과 함께 웃을 수 청주시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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