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요한묵시록 3장, 예수는 부유하였지만 마음이 가난했던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향해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경고한다.

등록교인 10만 명, 연 예산이 350억 원에 달한다는 세계 최대 장로교회의 원로 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했다. 기업을 물려받듯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준 '눈이 멀고 벌거벗은 세습'을 교단은 절묘하게 '합법화'했다. 잘 알려진 대로 예수의 헌신과 사랑에 감동을 받아 시작된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 대형교회는 라오디케이아 교회이며 그를 향해 ‘제발 문을 열어라’라고 외치는 문밖의 예수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다. 타성에 젖은 교회를 향해 외치는 예수의 고통을 그들은 모른 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독 이 교회의 부자 세습이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것은 대형교회 신앙적 일탈의 정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라 해도 세습이 이루어지면 교회가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게 된다. 비약이라 말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권위가 사람에게 이양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교회의 노골적 사유화인 세습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주술적 레토릭을 반복 사용하며 세습이 사적 이득이 아닌 오직 ‘신을 위한 일’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보편적 사람들은 개신교의 하나님과 세습을 강행한 그들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인지 묻고 있다.

일부 대형교회의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규모의 비대화가 왜 마땅한 것인지 세상과 신도들에게 정당화한다. 체온 없는 자본주의로 무장된 일부 기독교는 개인의 이득을 확장하는 행위들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존재로 전락한 것도 사실이다. 구원과 복을 누리려고만 할 뿐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고통은 나눠지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기적이다. 탐욕적이다. 이럴 때 대개의 신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목사님을 믿는다. 해괴하다.

소싯적 이른바 ‘선데이 크리스천’ 일상을 살아본 이로써, 그 어떤 종교이든 사회적 역할을 굳게 믿는 시민으로서 한국 개신교의 일련의 파생적 흐름들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종교는 외딴섬에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란 사회 공동체 안에서 자생되는 영혼의 샘물이다. 한 교회의 세습이라는 불온한 상황은 그 세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정황과 연계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세습 사건의 내면에는 종교권력의 이양과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의 부재가 있기 때문이다. 한 대형 교회의 세습 사건은 한국 사회가 지닌 뿌리 깊고 다층적인 문제들의 축소판이다. 강대국이 그 세력을 강화하고 확대해가려는 것과 같은 속물적 욕망이라면 확대해석일까.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보지 않고 개인이 이뤄낸 사적 조직으로 보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질과 권위가 우선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가치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다.

오늘날 개신교 한국교회의 가장 큰 불행은 목회자나 신도나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교회 세습과 관련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누군가 자신의 후임을 맡는다면 그것이 아들 목사가 된들 무슨 큰 문제가 되겠냐는 황망한 논리를 갖고 있다. 재벌의 세습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회사와 달리 교회는 개인 자산이 아니다. 그 교회를 일구기까지 신도들의 정성 어린 헌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종교인의 과세 문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교회는 비영리 사회 공동체의 일환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성경은 목회자들에게 사역을 마친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세습할 사유물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세습의 길을 걷고 있는 개신교의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 임무를 마치고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성도들의 헌금으로 지어진 교회에 대를 이어 머무는 것이 정녕 하나님의 가르침인가?

‘거리의 예수’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지금 당신들의 대형교회 문밖에 처연히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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