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義親王·1877~1955)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다. 배일사상이 강해 한일합방 이후에도 일제에 비협조적이었다. 1919년에는 대동단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해 상복을 입고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작전으로 인해 결국 발각돼 국내로 송환됐다. ‘독립신문’에 상해 망명을 계획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구로자키(黑崎) 사무관과의 교섭



▷지바 “그래서 다시 전하께서 내시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두 번째 근거는 내시가 직접 전하의 모습을 배알한 후 말씀을 드리고 대답을 들은 것인지를 확인해서 묻자 직접 배알하지는 않고 방 안에서 미닫이를 사이에 두고 그러한 말씀이 있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비전하의 말씀, 내시의 전언 어느 쪽도 전하의 모습을 직접 배알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구로자키 사무관의 말이 너무 불확실하여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사무관 자신이 전하의 모습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지 않는 한, 한 걸음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만약 그로 인해 책임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내가 경비상 필요하여 이러한 요구를 했다고 말할 것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이라도 내가 질테니 어떤 어려움이라도 무릅쓰고 꼭 전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알선토록 하라고 강경하게 구로자키 사무관에게 요구했습니다.

때는 벌써 오후 4시가 지났기 때문에 사무관은 이미 사택에 들어갔지만 제가 이와 같이 강경하게 요구하자 사무관도 놀라 자택에서 다시 사무소로 출근해 사무관 자신이 강경한 태도로 비전하께 꼭 전하를 배알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을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이와 똑 같은 일이 조선에 있었다 하는데 거처를 확인했을 때에는 존귀하신 주인공은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는 전적도 있었노라고 비전하에게 말씀드린 후, 만의 하나라도 이런 일이 전하께서 일어나서는 안 되므로 어디서라도 좋으니 이강공 전하의 모습을 잠깐만이라도 뵙게 해달라고 비전하에게 강경하게 말씀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비전하는 드디어 입을 여시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실은 전하께서는 어제 밤 집을 나가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경찰이 주위를 경계하게 되면 오히려 전하가 돌아오시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되니 제발 경찰 쪽에는 비밀로 해 주었으면 한다는 비전하의 부탁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카모토라는 고등과장이 내게 와서 전해 준 시각은 오후 5시가 넘은 때였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즉시 중대 사태가 돌발했다고 직감했고 곧 아카이케 경무국장을 만나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조선 전토는 물론 일본, 만주, 시베리아, 상해에까지 수색을 시급히 강구하도록 전보로 조치했던 것입니다.”



●종적(蹤迹)의 수사

▷지바 “그 사건 이후 다음 날까지 온 힘을 기울여 대 수사를 계속했으나 전하의 행방은 묘연 불명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 가지 단서를 잡을 수가 있었는데 이는 명월관 지점 주인인 황원균(黃元均)이라는 자가 경찰에 출두해 와서 어제 밤부터 명월관 기생집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흘러들어온 말에 의하면 이강공 전하를 수사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다소 마음에 집히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출두했노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거다. 마음에 집히는 것이 있다면 빠짐없이 그대로 들려주었으면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그 자가 말하기를 실은 어제 밤늦게 전하께서 명월관 지점까지 오셔서 인력거를 타고 거기서 다시 어디론가 가시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수배해 그 때 전하를 태워준 인력거의 인부를 취조한 결과 공평동(公平洞)에 있는 어느 집 문 근처까지 전하를 태워 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즉시 그 성문 안을 조사했는데 거기에는 몇 간의 집이 있었으나 용의선상에 오를 만 한 집은 한 집도 없었고 단지 빈집이 한 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빈집에 이전 거주자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관계도 찾아낼 수사 없었습니다. 단지 이 빈집이 어쨌든 전하의 탈출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 하에 여러 방면에 걸쳐 수배를 계속했고 탐사를 진척시켜 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로 기억되는데 내가 있는 제 3부장실을 수사본부로 하고, 경무국의 마루야마 사무관과 구연수(具然壽) 사무관 등도 참가해 수사를 획책하던 중 때에 맞추어 안동현에서 한 통의 전보가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펴보니 전하를 안동현의 정거장에서 발견 인도해 모 숙소에 체류를 부탁드리고 있는 중이라는 전보의 내용이었습니다.

후에 조사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전라남도에 사는 석동(錫東)이라는 부호가 전하에게 어기권(漁基權)을 저당으로 하여 3만원을 융통해 드리겠다는 취지를 그의 대리인인 이민하(李敏河)라는 자가 총독부 초탁인 정운복(鄭雲復)을 통해 두 번 정도 편지를 올린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는 3만원을 융통받기 위해 김삼복(金三福)이라는 종자 한 명을 데리고 공저(公邸)의 뒷문으로 빠져나가 명월관 지점 문 근처에 살고 있는 김정원(金精完)이라는 자의 집에서 돈을 받으실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공평동에 있는 어느 집까지 와 달라는 심부름꾼의 말에 의해 명월관 지점 문내에서 인력거를 타시고 공평동까지 가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평동에 있는 공가로 안내되어 가 보았더니 이민하라는 자가 나와 있었는데 가방을 열고 돈 3만원을 보여 주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뒤에 조사에 의해 드러났지만 백원짜리 한 장만 맨 앞에 있었을 뿐, 그 뒤는 전부 신문지로 된 위폐였습니다. 가방을 열고 잠깐 돈을 전하에게 보여드린 후 돈을 말씀드린대로 지금 내 손에 준비되어 있으니까 언제라도 융통해 드릴 수 있지만 반강제적으로 지금 상해로 가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는 그건 곤란하다고 말하고 거절한 순간 뒤에 있는 미닫이를 확 열어젖히며 5~6명의 불온 조선인이 돌연히 뛰어나와 전하의 주위를 둘러싸고 피스톨로 위협하면서 상하이 탈출을 강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좀 자유스런 생활을 희망하시어 돈도 융통하고 싶어 했던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당장 피스톨로 위협을 당하자 굉장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전하 자신이 저에게 말씀하실 때에 틀림이 없는 사실임을 인정하셨습니다. 전하는 이러한 협박을 받게 되자 할 수 없이 상하이행을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불온한 조선인들은 전하의 눈을 가리고 인력거를 타게 한 후 경성의 창의문(彰義門) 밖 약 1리 정도(4km) 떨어진 산 속에 있는 어느 일반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집에는 앞에서 말씀드린 정운복(鄭雲復)을 비롯한 불온한 조선인 5~6명 모두가 피스톨로 무장한 상태에서 전하를 상하이로 모시고 갈 계획에 대한 상담으로 하루 밤을 세운 후 수색역(水色驛)에서 하인의 모습으로 전하를 분장시켜 2~3명의 불온한 조선인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안동현까지 탈출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신의주 경찰의 활동

▷지바 “그 당시 내 쪽에서 수배한 전보가 평안북도 경찰부에 도착하자 즉시 경찰부는 요네하마(米山)라는 경부(警部)를 신의주에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한발 차이로 기차가 이미 출발해 버렸기 때문에 요네하마 경부는 자동차를 급속도로 몰아 압록강 다리를 넘어 기차를 추월하여 도착해서 오는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안동현 정거장에서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던 중, 천우일회의 기회라 할까, 바로 전하가 내리시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고, 곧 전하를 여관에 안내해 드리고 거기서 전보를 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안 일이지만, 압록강을 건너는 차 중에는 소관 경관이 통행증을 조사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황송스럽게도 하인의 모습이었고, 타인 명의의 통행증을 지참하고 계셨기 때문에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차대한 이강공 전하 탈출사건이 성공하여 종결을 짓게 되었으므로 수사본부는 매우 기뻐했고, 경무과장인 고모다 경시에게 수명의 경관을 수행시켜 전하를 마중하러 안동현에 파견하는 동시에, 전하의 탈출을 기도했던 불손한 조선인을 검거하기 위해 필요한 전하의 취조를 전보로 요구하자, 그 결과가 수시로 전보로 답해왔기 때문에 대체적인 경과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탈출 전후의 양상

▷지바 “이후 내가 직접 전하의 저택을 방문하여 탈출 전후의 상황을 취조했고, 금후 공공의 경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릴 때도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겠다고 전달해 드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불온 조선인의 본 근거지를 알아 수배를 했는데, 한참 수배하던 중 김경부(金警部)가 나에게 와서 전하를 유괴한 일당의 무리가 창의문 밖 모씨라는 일반인의 집에서 피스톨을 지참한 채 밀회를 갖고, 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경위급 간부를 소집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협의했는데, 거기 모인 모든 간부들이 이구동성으로 불온 조선인의 체포는 새벽녘에 하지 않으면 거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수사에 착수하는 것은 그들을 오히려 쫓아버리는 것과 같아 좋은 대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권총을 지참한 채 한참 심의에 열중하고 있는 자들을 바로 눈앞에 두고, 내일 아침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더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일거에 이들을 척결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즉시 경성 시내의 6개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피스톨을 지참하고 있는 형사 및 순사를 모두 소집하게 했습니다.

차출되어 온 형사 순사들은 17~8명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자동차 3대에 나누어 타고 김 경부(金 警部)를 안내역으로 해서 창의문 밖으로 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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