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월북', '해금'에는 ‘월남=선’, ‘이북=악' 이분법이 전제
문인들 향한 무지에 의한 오해 불러일으켜
북한에 간적 없던 포석도 '월북작가' 낙인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우즈벡 국민작가 알리세이 나보이를 기리는 나보이문학박물관 4층에 있는 ‘조명희 기념실’. 따로 기념실까지 차린 경우는 포석이 유일하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1894~1938)를 신 해빙기 남북과 아시아의 평화 교류의 문학적 상징으로 삼자는 의견이 나왔다.

납·월북 작가 해금 30주년을 맞아 지난 17~18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증오와 냉전 의식의 험로를 넘어 다시 평화 교류의 길로’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김성수 성균관대 교수는 ‘재·월북 작가·예술인 ‘해금’ 조치의 연구사·문화사적 의미’라는 발표에서 “그동안 이 명칭에는 ‘월남=선’, ‘이북=악’이라는 이분법이 전제돼 있어 일부 문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구제적인 예로 포석 조명희를 들었다. 포석이 세상을 떠난 1938년은 북한 정권이 들어서기 훨씬 전이었지만 그는 월북 작가로 낙인 찍혔고, 작품도 다른 납·월북 작가들과 함께 1988년 해금조치 전까지 금기시 됐다.

그는 포석을 비롯해 납·월북 작가들에게 씌워져 있던 ‘월북 프레임’을 풀 것을 제안했다. 이번 발표의 내용을 요약·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김성수 성균관대 교수
김성수 성균관대 교수

 

‘납·월북작가 해금’조치(1988.7.19.) 이후 30년째 해결되지 못한 문제 중 하나가 월북과 구별되지 않는/못한 ‘재북(귀북)’ 개념이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전부터 내내 이북에 거주하고 활동했거나 해방과 전쟁의 혁명적 비정상 정황에서 귀향하거나 그냥 집에 머물렀던 일군의 작가들 문제이다. 재북(귀북) 작가들로는 최명익 김조규 백석(재북/歸北) 안용만 유항림 한설야 이기영(월북/歸北) 이찬(월북/歸北) 이용악(월북/歸北) 백인준 이북명 윤기정 윤세중 지봉문 김순석 김북원 김우철 이원우 민병균 / 신불출, 이면상(歸北) 등이 있다.

월북, 재북, 귀북을 구분한 이유는 그들이 월북이면 죄가 있어 해금되지 않고 납북이나 재북, 귀북이면 면죄 복권되어 작품을 복원 유통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사실관계는 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가령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민족시인 김소월의 경우 1934년 12월 자살하지 않고 해방후까지 생존해서 이북에서 활동했다면 꼼짝없이 월북작가로 몰려 우리는 민족 애송시인 ‘진달래꽃’는 커녕 그의 존재조차 모를 뻔했다. 이미 그런 예로 이제는 민족 대표 시인이 된 이용악, 백석이 있지 않은가.

다른 한편, 한동안 월북자로 착각된 경우이다. 6.25전쟁기에 사망한 김태준, 유진오라든가, 마산에 칩거한 탓에 행불자였던 권환, 그리고 1928년 구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1938년 사망한 조명희 등의 경우이다. 월북자란 낙인이 잘못 찍힌 경우 후손들의 피해와 우리 문학사의 훼손을 어찌할 것인가?

가령 포석 조명희(抱石 趙明熙, 1894~1938)를 예로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1987년까지 조명희라는 이름 석 자는 월북작가라는 엉뚱한 낙인이 찍혀 ‘조O희’ ‘조X희’ ‘조포석’이라는 복자형태로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생애와 문학이야말로 “분단의 모순 속에서 어떻게 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이 지워졌는지 알 수 있는 한 전형”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조명희는 우리에게 월북 아닌 월북작가로 오인된 인물이다.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는 북한에 넘어간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북한이란 존재가 생기기 훨씬 전인 1938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신문학운동 초창기의 극작가이자 시인이요 카프 소설가였던 포석은 1928년 일제 탄압을 피해 소비에트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 정착할 때까지 문예지를 간행하고 러시아작가동맹 작가와 한인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일종의 ‘망명지문학’이라 할 연해주 한인신문 ‘선봉’(훗날의 ‘레닌기치’), 잡지 ‘로력자의 조국’ 등에 시, 평론, 수필을 발표하고 1934년에 결성된 러시아작가동맹의 원동(遠東)지부 간부를 맡는 등 정력적인 문예활동을 펼쳤다. ‘재소한인(在蘇韓人)문학 건설자’이자 사회주의 리얼리스트였던 그는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정책 와중이었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알마티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카프 활동기 대표작 ‘낙동강’이 1927년 처음 발표된 것을 보면 200자 원고지 60여 장 분량의 단편에서 50여 문장, 100여 군데가 ‘XXX’표시로 지워진 채 인쇄된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일제 검열당국에 의해서 끔찍하게 검열 복자된 것을 보면 일제당국이 민족해방운동에 애쓴 우리 진보적 지식인들의 형상화된 모습에 대해 얼마나 알레르기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다. ‘혁명’이니 ‘투쟁’이니 하는 단어뿐만 아니라 심지어 ‘폭풍우’, ‘폭발’, ‘조직’ 같은 말까지도 깡그리 지워야 했던 일제의 탄압은 차라리 경멸과 조소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것은 아예 이런 작가의 존재를 묻어버리고 작품을 읽지 못하도록 했던 지난 몇 십년동안의 우리 ‘내부 냉전적’ 사고이다. 좌파 계급이념에 대한 거부반응은 그 내부에 담긴 민족 독립의지까지도 함께 매몰시키고 우리 근현대문학사의 내용을 상당부분 친일작가 중심으로 오도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를 월북작가 명단에 오랫동안 잘못 넣은 관행은 전적으로 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선입견과 무지 탓이다. 그가 19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하여 1938년에 사망한 사실을 알았던들 그런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낙동강’의 100여 군데 검열 표시가 원래대로 복원되어 작품의 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남한책도 북한책도 아닌 러시아판 ‘조명희 선집’(1956)에서만 가능했다. 이 또한 1980년대에 역수입되어 우리에게 원래 작품이 소개된 실정이다.

1987,8년까지 우리에게 월북작가로 오해된 조명희가 북한에는 이미 1956년 재조명되었다. 조명희가 러시아에서 재혼한 부인 황명희의 남동생 황동민이 소련작가동맹원이 된 후 매형의 복권에 앞장섰던 것이다. 황동민을 비롯한 조선아, 조알렉세이 등 자손들의 노력에 의해 조명희는 복권되고 소련작가동맹 산하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에서 ‘조명희 선집’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이 책을 마침 모스크바에 친선 방문한 방러 조선작가동맹원에게 전달하여 북한에 소개된 것이다. 이를 읽고 북한 평론가 엄호석, 김재하가 논저를 쓰고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조선문학’에 시를 소개한 바 있다.

북한에서의 조명희 인식 평가 연구는 카프, 이기영·한설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사적 운명과 궤를 같이 한다. 카프 중심의 월북 작가들이 북한문학의 모태이며 그들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 북한문학의 모태로 여겨졌던 1950년대에는 조명희가 일종의 ‘기원 상징’으로 중요시되었다. 북한 문학장에서 조명희를 재인식한 것은 1956년 소련 자료의 유입과 1956~64년 카프 전통 담론이 주된 원동력이었다. 그 핵심은 조명희의 대표작 ‘낙동강’(1927), ‘아들의 마음’(1928) 등 목적의식적 방향전환기(1927~8) 작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초기 특징을 보인다고 규정되었다. 이는 북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학의 역사적 정통론에서 조명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1967,8년 주체사상의 유일체계화가 구축된 후 북한 문학장에서 조명희 존재와 그의 문학은 잊혀져갔다. 김일성의 빨치산 게릴라 투쟁을 북한 역사의 신기원으로 삼아 ‘항일혁명무장투쟁’을 유일 전통으로 절대시한 주체사상이 유일화되자, 그에 따른 항일혁명문학예술 적통론에 기초한 주체문예론 확립(1967~75)과 주체사실주의 미학(1992~)이 고착되자 이후부터는 조명희와 그의 문학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줄어들거나 아예 무관심 대상으로 변모해버렸다. 한설야의 숙청(1962)과 이기영의 실질적 은퇴 후 북한 문학장에서 더 이상 카프 정통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보편 미학이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숭배가 강화된 주체문예이론체계에 따라 ‘수령론, 총대미학, 주체사실주의’ 창작방법이 유일화되자 조명희 문학은 예전 같은 기원 상징의 위상을 차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따라서 역으로 볼 때 ‘만들어진 전통’인 수령론이나 빨치산문예 전통론이 폐기되면 (앞으로 씌어질 ‘통일된 민족문학사’의 어느 국면) 다시 조명희 문학이 북한문학의 지워진 기원 상징으로 복권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어떤가? 돌이켜보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납·월북 작가 예술인들은 암암리에 거론 자체, 존재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조명희, 조벽암(사촌, 월북 작가)의 자손인 이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에 근거하여 반역자로 몰렸고 심지어 중세처럼 후손들에게까지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다행히도 조명희는 1989년 발표자의 소개(‘소련에서의 조명희’, 창작과비평 64호) 이후 우리 한국에서는 학계·문단과 고향 진천을 중심으로 조명희란 존재가 재발견되고 복원, 복권(신원伸冤)되어 조명희문학제와 학술대회가 매년 열리고 문학관까지 건립되어 지금까지 기려지고 있다. 심지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우즈벡 국민작가 알리세이 나보이를 기리는 나보이문학박물관 4층에 ‘조명희 기념실’까지 꾸며져 있다.

이제 조명희와 그의 대표작 ‘낙동강’을 남북한 통일 문학의 한 상징으로 교과서, 문학교육 등 정전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신냉전체제를 끝내고 평화체제로 정착 중인 2018년 남북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 교류를 상징하는 문학적 심상지리로 확산시킬 수 있다. 즉 조명희의 문학적 행적을 따라서 ‘진천 청주-동경-서울-평양-블라디보스톡-하바로프스크-알마티-타슈켄트’에 이르는 트랜스아시아 전체의 문학기행 지도를 남북 및 아시아 평화 교류 협력의 상징으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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